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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Oct 11. 2020

하필 서른아홉에, 코로나

나의 삼십대가 저물고 있다. 허망히.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 어차피.


서른아홉에 찾아온 팬데믹. 열아홉, 스물아홉, 쉰아홉에게도 올 한 해는 악몽같이 기억될까. 제 아무리 인생이란 게 예측을 불허한다 해도, 내 나이 서른아홉에 전염병의 창궐을 경험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도 나는 잘도 나의 앞길을 점치며 살아왔다. 계획과 예상과 각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 그런 과거에 깊이 감사했어야 한다는 걸 서른아홉이 돼서야 깨닫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나는 멋쩍고 얼얼하다. 서른아홉의 반은 락다운(lockdown)과 격리(quarantine)로 보냈다. 이대로 삼십대에 작별을 고하려니 사실 좀 억울하다.


망할 놈의 전염병이 일상을 온통 뒤틀어 놓았다. 꼭 그게 아녔대도 삼십대를 떠나보내기 아쉽고 억울한 심정은 비슷했을 텐데… 나는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핑곗거리가 있다는 건 정말 안심되는 일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이래서 졸렬하다. 태초부터 인간은 줄곧 책임을 회피해왔다. 아담은 이브 때문에 열매를 깨물었다고, 이브는 뱀이 자기를 꼬드겼다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벌어지긴 했으나 나는 그걸 핑계할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아니다. 전염병이야 어찌됐든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그만이다.


지구를 빙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 사람들은 코로나 전과 후로 세상을 나누어 설명하려 든다. 그리고 또다시 점쳐본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러할 것이라고. 신이 아닌 이상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게 대비할 수 있는 미래라면 얼마나 좋을까.

Tower of Babel, 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

그러고 보면 인간은 졸렬할 뿐 아니라 포기할 줄도  모른다.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늘 높이 탑을 쌓고 또 쌓았던 고대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은 끈질기게 대물림되어 나의 DNA에도 안착돼 있다. 그런 욕망들은 문명을 일으켰지만 그만큼 기괴한 일들도 많이 일으켰다.  


엎드려야만 보이는 것들


아랫집 남자가 구성진 욕을 곁들이며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무서웠지만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귀를 바짝 마룻바닥에 갖다 댔다.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완벽히 엿듣기에 나의 영어 실력은 역부족이었다. 대충, 내놓으라는 돈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는 악다구니였다. 그건 그렇고 바닥에 바짝 엎드리니 바닥에 얇게 쌓인 먼지들이 보였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분명 어제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도 했는데. 더러웠다. 바짝 엎드려야만 보이는 더러움이 있었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전 세계의 인간들을 간만에 바짝 엎드리게 만들었다. 쳐든 고개를, 높아진 콧대를 바닥에 처박고 예전에는 보지 않던 것들을 바라보게 했다. 어쩌면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목숨을 걸고 식료품을 사야 될 처지에 놓이니까 먹을 게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쇼핑몰 문이 닫히니까 쇼핑에 미쳐있는 내가 보인다. 재택근무가 시작되니까 아이들과 씨름하는 아내가 보인다.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니까... 하루하루가 귀하고 또 귀하다.


대단한 체 살고 있지만 뻥같이 부풀려진 게 인간이다. 엎드렸을 때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실제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할 것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부터 그렇다. 자식에게라면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을 것 같은 시늉을 하고 살았던 나다. 24시간, 6개월을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지내다보니 나 때문에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매일 협박과 공갈을 일삼고, 군대보다 더 엄격한 규율로 아이들을 다스렸다.


아이들은 되레 작금의 상황에 금세 순응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나름의 즐거움을 찾으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곁에 있어 좋다고 했다. 불평과 불만에 휩싸여 분노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내가 훌륭한 엄마라는 건 그야말로 완전 뻥이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휑하니 차를 몰고 쇼핑몰로 갔었다. 한 바퀴 돌고 와 돈을 쓰면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방구석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만큼 두 눈을 부릅뜨고 걱정 근심의 원인을 찾아 정면돌파해야 한다.


누구나 엎드려야만 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등을 두기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바이러스 앞에서는 공평했다. 치렁치렁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태초의 인간처럼 알몸으로 서야 했다.  


맑은 하늘이 보이고 지구가 모처럼 숨을 쉬는 것 같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바짝 엎드러진 나는 더러운 내면과, 외면하려 했던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까. 마흔 전 가까스로 보게 됐으니까. 청소해야 할 부분은 깨끗이 청소하고 청산해야 할 부분은 청산하게 됐으니까.



소멸되어가는 젊음과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을 놓아준다. 황망하다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결국은 재를 남길 테지만 타오르는 불꽃은 뜨겁다. 불같은 젊음의 시간들은 나에게도 있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잡을 수 없는 걸 잡으려다 망치고 싶지는 않다. 대신에 맑게 열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하고 싶다. 마흔에는 전염병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래도 계속 엎드리기를 또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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