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를 쓰다가 4

초보 가계버가 초보 가계버에게-숫자를 직시하라

by BRG

세상에 외면하고 싶은 두 종류의 숫자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체중계에 나타나는 숫자이고 둘째는 카드대금이 아닐까요. 카드대금 청구서를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허투루 쓴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나만 좋으라고 쓴 건가?’ 하면서도 매번 성적표 받아보는 심정인 것은 왜일까요? 청구서의 숫자가 오늘도 나에게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라고 말하고 있네요. 허리띠를 졸라매라는데 목까지 졸라 조여와요. 원금은 외면하고 싶습니다. 최소 입금금액만 집어넣으면 안 될까요? 돈 나갈 데가 천지인걸요.


경제 전문가들이나 재테크 유투버들이 한결같이 이 한 가지를 강조하더군요. 투자나 저축에 욕심부리기 전에 빚부터 청산하라! 여기서 말하는 빚은 보통 신용카드 빚입니다. 빚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투자를 하거나 저축을 하면 결국 또 다른 빚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빚이 쌓여 있다면 최우선으로 그것부터 청산해야 매달 받는 월급 전액을 오롯이 규모 있게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를 미친 듯이 구매하고 싶을 때 이런 말들은 잘 들리지가 않죠. 그리고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거 아니냐며 쉽게 무시해버립니다.


신용카드=선 구매, 후 지불입니다. 지불 유예=매력적입니다. 사실 유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단지 무언가를 구매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그것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가를 따져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죠.


눈 뜨자마자 쇼핑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쇼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저 아니에요). 이 사람이 갑자기 김생민 같은 짠돌이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요. 어마어마한 재정적 위기나 천재지변(?)이 닥치지 않는다면 말이죠. 소비는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길들은 습관은 고치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쇼핑중독에서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렇다면 큰 욕심부리지 말고 가계부부터 써보라고 권해주고 싶습니다. 가계부를 쓰면 자신의 소비 습관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보이면, 고칠 수 있습니다.


태생이 짠돌이가 아니라면 가계부를 쓰고 난 뒤 반드시 놀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별생각 없이 쓴 금액들이 한 주 단위로 합쳐졌을 때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 있거든요. 어제 점심 식사 후에 동료들에게 ‘가볍게’ 쏜 커피, 오늘 ‘간단히’ 구입한 스킨케어, 내일 사려고 봐둔 티셔츠 ‘단 한 장’이 모이면 적지 않은 금액을 만드니까요. 이걸 다 신용카드로 결제했으면서 청구내역 가지고 놀래기 있기없기?


가계버 6개월 차로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가계부 작성 요령이 있다면요, 저는 지출내역을 식료품비, 외식, 기타의 세 가지 카테고리로만 구분합니다. 김생민 과가 아니라면 이렇게 단순화 시켜야 그나마 가계부를 지속적으로 써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부터는 한 주 단위의 목표 소비 금액(예산)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카테고리 별로 말이죠. 식료품비와 외식비와 기타 항목의 한 주 소비 목표 금액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사용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주 목표 금액보다 덜 사용하면 되게 기쁜데 이러면 다음 주에 또 초과하여 쓰게 되어 있더라고요.


언제나 골 goal을 너무 높게 잡지 마세요. 특히 저 같은 ‘작심삼일 파’나 ‘돈은 일단 쓰고 보는 것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요. 유아교육 전문용어로 ‘비계 설정’(Scaffold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계’란 것은 원래 고층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이 올라설 수 있도록 받치는 발판을 말합니다. 교사의 역할이 이러한 비계를 설정해 주는 데에 있다는 말인데요, 이 비계는 아동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실제적 발달 수준도움을 받으면 수행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 즉 근접발달영역 안에서 설정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 수행할 수 있었던 과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제로 바뀝니다. 그러면 또다시 교사는 좀 더 높은 수준의 목표를 설정해 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계 설정을 계단을 오르듯 반복적으로 할 때 아동의 점진적인 인지발달이 일어납니다.


뭔 얘기를 이렇게 어렵게 하냐고요? 한마디로 말해, 교사의 교수활동이라는 것도 아주 정교한 목표수준 설정으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골을 정할 때 이 비계 설정을 사용해 본다면 우리는 성인이니까 누군가의 도움은 필요 없는 대신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목표’와 ‘조금 노력하면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목표’ 사이로 설정한다. 이렇게 대입하면 되겠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산을 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장 보는 데에 일주일에 25만 원을 소비하던 사람이 갑자기 5만 원으로 예산을 대폭 줄여 잡는다면 그건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해 실천해보고 조금씩 조금씩 큰 골을 향해 올라가면 됩니다.


다시 신용카드 얘기로 돌아가서, 저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청구서의 숫자와 친해지기로 했습니다. 그게 가계버 6개월 차의 또 다른 변화입니다.


월급-이번 달 소비금액= @ 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월급-이번 달 소비금액-누적된 카드값= -@


입니다. 이래서는 한 달 예결산이 깔끔히 이뤄지지가 않아요. 월급 통장은 월급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휴게소가 될 뿐이고요.


다이어트를 해보니까 첫 단추가 체중계 위에 올라 나의 육중함을 나타내 주는 숫자, 그 숫자를 직시하는 거더라고요. 신용카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용카드 사용을 줄이려면 여러 장의 카드대금 청구서를 모조리 모아 적나라한 숫자들을 쳐다봐야 합니다. 처음에는 좀 떨릴 수 있어요. 빚의 크기에 따라 청심환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빚의 크기를 다 더한 그 무시무시한 숫자를 우리는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게 빚 다이어트의 시작입니다.

피식대학/방재호, 33세/다단계

“1억 빚을 다 갚고도 아파트 세 채를 샀습니다.” 이런 간증 하고 싶으세요? 아마 이런 분들도 시작은 우리처럼 미약했을 겁니다. 십만 원이든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일단 빚부터 쭉쭉 갚아야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돈이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는지, 일주일 별, 한 달 별 소비 금액은 얼마인지, 카드값은 왜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그에게는 정말 답이 없습니다. 돈에 지배받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나요? 첫 단추는 숫자를 파악하는 것,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쓰는 돈의 숫자를 파악하고, 빚이 얼마인지 파악하세요.


초보 가계버 일주년 기념일에는 좀 더 임팩트 있는 체험담을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여러분! 내년에는 올해보다 통장에 월급이 오래 머물러 있는 그런 멋진 우리가 되어 보아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계부를 쓰다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