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G Jan 01. 2021

마흔이여 오라

30살은 무거워서 집에 두고 다녀요

“하아... 마흔이야? 참나, 마흔?”

“참… 나~마흔이다 마흔. 아... 진짜 마흔이야 마흔.”

“마흔이냐 진짜? 와.. 대박 마흔 살...”


기막힌 심정을 속으로도 말하고 겉으로도 말하면서 계속 말하는 중이다. 식스센스(옛날 영화; 반전영화의 대명사, 심리스릴러 호러 영화)를 보고 난 뒤랑 비슷한 느낌이랄까. 깜빡 속았단 게 억울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분. 내 나이 따위 누가 나에게 속일 리 없고, 흐르는 세월일 뿐 반전이란 가당치 않으나 기분이 그렇단 얘기다. 그래도 벌써 마흔이란 거, 장르는 확실히 호러다.


오긴 오는구나 마흔이. 달랑 하루 남은 2020년의 마지막 날, 지난날을 반추해 본다. 그러면 가장 푸릇했던 20대의 찬란한 시절을 막 써버렸다는 자괴감이, 역시나 나를 괴롭히고 만다.


그때의 나는 아파트 30층에서 현금을 뿌리는 사람처럼 헤펐다. 다만 헤픈 대상이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게 차이점이다. 금수저가 아닌 게 억울해서,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서 그거라도 막 쓰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기껏 들어간 대학을 맘대로 취급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갔다. 혹은 기어코 학교까지 가서 강의를 쨌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요즘의 20대들이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사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나는 토일토일토일토로 살았던 거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믿는 구석이 있는 건 전혀 아니었으니까 이건 무모함의 Flex였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잠도 자고 싶을 때까지 잤다. 그러다 머리가 박살날 것처럼 아프거나, 배를 곯다가 영양실조에 걸릴 것만 같거나, 엄마의 “저 게을러터진…”으로 시작되는 설교가 들리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게을렀으면 게으른 게 터지기까지 할 수 있는지, 어쨌든 엄마는 나를 게으르다 못해 터진 애로 불렀다. 주둥이가 터지긴 터져서 거기에 대고, “아, 어제 늦게 잤어.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난리야”라고 대들었다가 ‘게을러터진’에 ‘못돼 처먹은’까지 얹어 욕을 먹곤 했다.   


20대 중반에는 임용고사(요즘은 ‘고시’가 되었다)를 준비한답시고 노량진을 전전하기도 했다. 고시 타입도 아니고 공무원 타입도 아니면서 ‘안정’이란 두 글자에 솔깃해 저지른 돈 낭비였다. 없는 형편에 비싼 학원비를 대준 엄마께 죄송할 따름이다. 1년 동안, ‘이런 공부 따위 고루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만 줄창 했다. 낙방은 당연했고 그 후엔 미래나 꿈같은 건 아예 쓰레기 통에 처박아 둔 사람처럼 살았다.


가장 울창해야 할 20대를 죽은 화초 마냥 축 늘어진 채 살았으니 나도 모르는 우울증이 있었나? 지금에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은 잘 갔다.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 아니라서 결혼과 미국행과 출산 등을 거친 30대의 나는 초큼 철들었고 나름 고군분투했다. 변한 건 사실이다. 30대의 나와 20대의 내가 조우한다면 서로에게 뭐 저런 게 다 있냐고 손가락질할 만큼 말이다.


시간이 사람을 저절로 성숙하게 한다는 건 거짓말이고 인생의 풍파가 사람을 바꾼다. 20대엔 세상 근심 다 짊어진 사람인 양 행세했지만 엄마의 잔소리만 잘 토스해도 살 만한 무게였다. 결혼과 출산은 나를 어느 순간 엄마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건, 잔소리를 듣는 입장에서 하는 입장으로의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좋기는커녕 그렇게 무겁고 힘겨울 수가 없었다. 잔소리 쿠폰을 남발할 권리 따윈 개나 줘버리고 그저 욕먹더라도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고난과 철듦이 비례한다면 40대에는 차라리 철부지 같이 살고 싶다. 더 큰 고난을 넘어설 자신은 아직 없는데 덜컥 이렇게 불혹의 문턱에 섰다. 한국은 벌써 새해니까 고딩 친구들로 이뤄진 단톡 방에서 모두의 40을 축하했다. 계란 한 판보다 무거울 40대의 중량을 어림으로나마 짐작하면서.


시간 귀한 줄 모르고 살던 20대가 있었기에 요즘은 세월을 아낀다. 세월도 돈도 이렇게 아끼다간 언젠가 진짜 부자가 될 것 같다. 20대에 열심히 살던 사람이 40대에 와서 방탕해진 케이스랑 똑같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인다. 후회할 필요는 없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된다.


낡은 해를 갈아치우고 새해를 맞는 마음이 간만에 세신 한 사람처럼 말갛고 상쾌하다. 마흔이라고 되게 막 어른스럽고 의젓하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적당히 귀엽고, 젊고, 상큼하게 살고 싶다. 그렇게 작정하니까 두렵지도 않다.


이제,

마흔이여 오라.

근데 너무 무겁지는 않게 와 주라.


작가의 이전글 사실은, 오늘 아침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