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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Oct 26. 2020

사실은, 오늘 아침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오늘이 며칠이죠?

글쎄요, 10월 중순인 건 알겠는데 며칠이더라...


좀 전에 하시려던 말씀이 뭐였어요?

아, 까먹었어요.


지난 주말엔 뭐하셨어요?

사실은, 오늘 아침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심한 건망증을 호소하는 최 00(만 38세)씨는 최근 자신의 이런 증세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병원을 찾아가자니 좀 유난인 것 같고 혼자 걱정만 하고 있기엔 증세가 가볍지 않은 것 같다.



어디서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어? 오늘 일기예보에 비 소식 없었는데… 창문을 확인해보니 비는 내리지 않는다. 웬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상한 소리에 수상한 냄새까지! 나는 탐정이라도 된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이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다) 부엌이다! 아차차, 오징어볶음! 점심으로 먹으려했던 오징어볶음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다. 불과 몇 분 전에 불을 올렸을 텐데 방에서 다른 일을 한다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른한 오후, 피곤이 밀려온다. 커피 한 잔 해야겠네. 오늘은 어쩜 커피 한 잔을 안 했을까? 저벅저벅 커피머신으로 걸어간다. 저 검은 액체는 무엇?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가 주전자 주둥이 끝까지 가득 담겨 있다. 차가워진 커피를 데우며 아침에 커피를 내린 사람이 정말 나였을까 생각한다.    


마트에 가면서 오늘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간장, 간장, 간장, 간장. 도착하자마자 간장을 카트에 넣는다. 드디어 성공했어. 벌써 몇 번째 간장을 빼먹고 장을 봐왔다. 신경 쓰니까 그래도 기억이 나네. 집에 돌아와 휘파람을 불며 방금 사온 식료품들을 정리한다. 캐비닛을 열어 간장을 넣으려다 소름이 끼친다. 뜯지도 않은 새 간장 한 통이 이미 캐비닛 안에 떡하니 들어있다. 지난번 장 볼 때 사온 건가… 진짜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데워먹으려고 전자레인지에 넣었던 음식을 며칠 후에 발견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나는 왜, 언제부터, 뭐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스마트폰 부작용인가? 밀가루를 너무 많이 먹었나? 뉴욕 공기가 더러워서? 갱년기가 일찍 왔나? 돌볼 사람이 많아서???


돌볼 사람이 많아서가 아닐까라는 가정이 나로서는 가장 위로가 된다. 결혼 전에는 아니, 아이를 낳기 전만 해도 오롯이 나의 일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의 일은 뒷전이고, 남편과 아이들 챙기는 게 우선순위가 되었다.

잠시 나의 남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손이 무척 많이 가는 사람이다. 이발하라고 잔소리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머리카락을 기를지 모른다. 더러워진 옷을 제발 빨래통에 넣어 달라고 하지 않으면 일 년 동안 옷을 빨지 않을 수 있다. 양말이 도대체 그게 뭐야?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상 망측한 스포츠 양말에 양복을 매치하여 입고 다닌다. 도시락을 싸주지 않으면 회사 근처 슈퍼에서 2달러짜리 빵 하나로 끼니를 때워버린다. 언뜻 보면 까다롭지 않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게 나를 너무너무 귀찮게 한다.  


아이들은 말해 뭐하랴, 설상가상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손이 갈 일은 두 배로 늘었다.

‘남편 다음 주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잊지 말고 세탁소에 양복을 맡겨야겠다. 내일은 애들 학교 가는 날이니까 까먹지 말고 물병, 도시락, 마스크, 질문지 챙겨 보내야 해. 하교 후에 둘째 소아과에서 건강진단서 받아오고 그 후엔 두 놈 다 꼭 미장원에 데려가 이발을 해야지. 아참, 나 오늘 밤 줌(zoom) 미팅이니. 잊지 말고 들어가야지.’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식구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커피를 내렸다거나 오징어볶음이 불 위에서 타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이런 실수들이 자꾸 모여 창피하니까 나 혼자만 알고 있고 싶은데,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게 된 사건이 있다.


그날도 겨울 옷을 꺼내고 여름 옷을 집어넣는 일을 하는 동시에 온라인 수업을 받는 아이들을 봐주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 먹을거리를 챙겨주면서 나는 벌여놓은 일들이 심란해 서서 먹었다. 그 바람에 체하고 말았다. 속도 속이지만 두통이 너무 심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날이 수요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밤에 예정된 줌 미팅을 취소해야만 했다. 단톡 방에 알렸다.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제가 너무 심하게 체하는 바람에 미팅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꼭 빠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남편에게, 오늘은 미팅에 못 가니까 아이들은 내가 재울게.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거실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나를 부른다.

오늘 왜 미팅 못 들어간다고?

체해서 머리 아프다니까.

오늘 화요일이야.


단톡 방에는 나의 체기를 걱정하는 사람들보다 오늘이 수요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대게는 금세 자신의 착각을 자각하기 마련인데 내가 저녁 9시가 넘은 시각까지도 그날이 화요일이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 탓이기도 할 테고, 줄줄이 달린 혹들 때문일지도, ‘디지털 치매’라고 전자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생긴 증상인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건 치매로 고생하는 울 아빠의 전철을 밟을까 봐서다. 지난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랭 두드러기로 유산소 운동이 불가능한 나에게 한의사가 제안한 아주 소극적인 운동법들이 있다. 호두를 가지고 손에 굴려 보세요. 고무밴드 같은 걸로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것도 운동이에요. 어려서 할아버지들이 하시던 걸 많이 봤었는데 그런 운동 같지 않은(?) 운동이라도 하면서 뇌를 좀 자극해야 할까 보다.


생각해보니까 얼굴의 주름이나 늘어진 살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정신활동의 장애이다. 오늘이 며칠인지, 난 누군지 또 여긴 어딘지 알 길이 없다면 빤빤한 외모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더 늙기 전에 육체와 정신이 필요 이상으로 쇠퇴하지 않도록 돌보아야 하겠다.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지고 있는 공식이 ‘삶을 단순하게’라고 한다. 안 그래도 챙길 것이 많은데 공사다망하기 그지없는 나의 삶을 좀 더 단순화해야 하지 않나 싶다. ‘뷔페에서 깨달은 선택과 집중’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취할 것만 취해서 거기에 에너지를 더욱 집중해야겠다.   



뭔가 구린 기분이 최 씨를 지배했다. 또 뭐 잊은 게 있었나. 머리를 굴려 생각해내려 애쓴다. 띵! 하고 머리에 불이 들어왔다. 급하게 세탁기 문을 열고 한 참 전 돌려놓은 빨래를 건져 올린다. 구겨진 빨래를 보며 한 숨을 쉬다가 그저 세제를 넣고 다시 돌리기로 한다. 온몸의 장기를 자극해 준다는 지압 신발을 찾아 신는다. 호두 두 알을 손바닥에 굴리며 생각한다. 취미생활이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던데, 글이라도 써볼 요량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어쩌면 세상에는 건망증으로 힘들어하는 수많은 최 씨들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사례를 공유함으로써 서로 공감共感하고 공생共生할 수 있다면 썩 나쁜 일도 아니라고 최 씨는 생각한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_사실은, 오늘 아침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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