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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May 18. 2021

일기는 추억들을 부르지 아랑곳없이

feat. 그 노래

일기장, 가계부, 메모장... 나는 나의 기록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박스 안에 모셔둔다. 내가 살아온 기록은 나의 보물이다. 그러니 기록이 담긴 상자는 나에게 보물상자인 것이다. 작년에 쓴 가계부를 찾으러 창고에 간 김에 보물상자를 뒤져 10년 전 일기장을 찾았다. 가끔 예전 일기를 찾아 읽는다. 그때 나는 어떤 일에 몰두했었나. 나를 압도하던 그 문제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 ‘이것’ 때문에 나는 정말 괴롭다고 일기장에 쓰여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거짓말 같이 ‘이것’을 잊었다. 망각의 장난인지 장난 같은 인생인건지.


아들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하나하나 읽어 내려간다. 버젓이 세상에 나와 8년째 살아가고 있는 아들. 1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아들. 어엿한 생명체, 그가 만들어내는 선율을 듣는다. 그때 네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이 순간의 음악도 없을 테지, 일기장을 꼼꼼히 읽으며 생각한다.  


걱정 근심이 참 많았다(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남편의 학업과 불투명한 미래가 주된 걱정거리였다. 그리고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 내 일기장이지만 남의 사정도 적혀 있다. 유학생 타운에서 살았으니 매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의 반복이었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모임에서 내놓은 기도제목을 1, 2, 3 숫자까지 매겨가며 또박또박 적어두었다. 그들의 기도제목을 읽어나가며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해 본다. 나를 스쳐 지나간 그 많은 인연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나. 그들이 간절히 올리던 기도가 무사히 하늘에 상달되었기를 바래본다.


일기는 추억들을 소환했다. 낯 간지러운 신혼의 기록을.


-남편의 시계줄을 갈고 왔다. 철든 와이프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머리카락 팔아 시계줄 샀다면 모를까 왜 때문에 뿌듯?)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오빠의 모습이 너무나 짠했다. 애잔한 마음으로 버스의 뒤꽁무니를 계속 쫓았다. (학생이 공부하러 가는게 왜?)

-목이 붓고 가래가 끓는 오빠를 아기처럼 보살펴 주었다. (아기.......어떻게 다 큰 어른이 아기...노인네 아니고?)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옮겨 적기 거북해 이 정도로만 쓴다. 암호도 아닌데 해독이 필요한 듯 정색하며 읽었다.


얼마 전 출산을 앞둔 지인이 한 말이 떠오른다.

“남편은 아기가 나와도 여전히 저를 넘버 원으로 사랑해줄 거래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때 나는 속으로, ‘두고 봐라, 순진하긴...’이라고 해버렸다. ‘두고 봐라’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마음의 소리였을 테고. ‘순진하긴’은 아직 신혼인 그들 부부에 대한 부러움과 하지만 ‘너희도 별 수 없을 걸’이라는 못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책임져야 하는 머릿수가 많아지면 암만 애처가라도 사랑을 n분의 1로 분배하게 마련이다. 10년 만에 읽는 신혼일기에서 나는 지인만큼 순진했던 그때의 나를 보았다. 울 엄마도 순진해서 아빠를 만났고 나를 낳았을 테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억이기도 악몽이기도 한 애물단지 똥차 이야기를.


10년 전에 우리는 한국돈 500만원 짜리 똥차를 끌었다. 귀국하는 지인이 내놓아 믿고 구매한 차였지만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다. 멀쩡히 달리다 길바닥에 두 번 주저앉기도 했다. 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 번은 차의 축이 부러졌고, 한 번은 바퀴의 부품이 튕겨 나가서였다. 정비사의 말에 의하면 고속도로에서 그랬다간 차가 전복되었을 거란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겨울이면 도로에 눈 녹이는 소금 천지였다. 차고에 차를 고이 모실 수 없는 환경에서는 소금에 차가 부식되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차를 샀을 때는 이미 차체가 많이 부식된 상태였다. ‘차알못’이었던 우리는 그가 이미 그 차의 두 번째 오너라는 점을 간과했다. 게다가 그가 어떻게 차를  관리했는지, 실제 차의 상태는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덜컥 차를 구매한 것이다. 말썽 많은 차를 끌고 다녔으니 일기장에도 유난히 차에 대한 걱정이 많다.


-오빠가(남편) 내일부터 디트로이트로 인턴을 가는데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지 않을지 걱정이다.  

-여행할 때마다 차가 고장 날까 여행을 하면서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알패드에 차를 맡겼다. 끽끽 대는 소리가 사라졌다. 속이 다 시원하다.  


차가 고장 나면 항상 우리는 ‘알패드’라는 곳에 차를 맡겼다. 수소문하여 알아낸, 그 근방에선 가장 저렴한 정비소였다. 동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 아저씨가 주인이었다. 그 아저씨나 나나 발로 하는 영어였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은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아저씨가 유난히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차를 맡기거나 찾으러 갈 때 반드시 여자를 대동하였다. 심지어 남자가 차를 맡기면 가격을 비싸게 받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루는 어리고 예쁜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수리된 차를 찾으러 갔다. 우리를 보자마자 당연 아저씨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수리비를 깎아주었고 얼마 안 되는 팁을 던져 줘도 싱글생글이었다. 정산하는 내내 보이던 아저씨의 징그러운 미소와 눈빛이 찜찜하고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그런 기분 따위는 무시하는게 나았다. 다음에는 남편 혼자 가라고 해야지 다짐했지만 그 다음에도 나는 따라 나갔다.



대충 이런 얘기들을,  아는  얘기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단편적으로만 드문드문 기억나는 사건들이 10  일기장에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때 죽어라 골몰했던 문제가 지금은 거짓말 같이 풀려 있다.  그런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들에 너무 압도되지는 않기로 한다. 어쩌면 10 뒤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걸, 그때는  그랬을까 후회할  있으니까.  똥차의 악몽도 이제는  추억이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10, 꾸준히 일기를 쓰기만 하면 된다.



_읽으면서 듣기

존박, <그 노래>

노래는 추억들을 부르지 아랑곳없이’

https://youtu.be/MOhmKaUNE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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