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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Jul 12. 2020

실패하는 너를 실패 없이 사랑할 것

“다 때려치워!”


남편이 두 번째 고배를 마신 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변호사 시험, 그것도 미국에서? 로스쿨 졸업생들 봤잖아. 이민 2세거나 최소한 미국에서 석사쯤은 마친 사람들이라고. 오빠 같은 토종 한국사람이 볼 시험은 아닌 것 같네. 그냥 다 때려치우고 귀국해!”

더 이상 버틸 자금도 없었고 합법적 체류 기간마저 끝나가던 때였다. 아니, 무엇보다 거듭 실패하는 그를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음악도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그가 어떤 음악가로 성장해 나갈지 우리 모두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남편의 피아노 치는 모습은 정말 멋져 보였다. 결혼 전에는 그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서,

“나는 오빠가 길거리 악사여도 좋아요. 어디든, 오빠랑 음악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거야.”

라는 막말(?)을 해댔다. 이런 남편이 갑자기 잘하던 음악을 그만두고 로스쿨을 간다고 했을 때에도, 그것도 미국에 있는 로스쿨이어야 한다는데도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속으론 ‘음악도 잘하는데 머리도 좋아!’라면서.


우리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남편의 나이는 서른 넷이었다. 남편이 로스쿨에서 힘겹게 유학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결혼 전도사, 사랑 전도사였다. 한국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결혼해, 결혼.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오빠가 너~~무 잘해줘!”라고 말이다.

실제로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다.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하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편이다. 잔소리하기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무거운 짐은 자신이 홀로 지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지도, 징징대지도 않았다. 그는 착한 남편,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꾸역꾸역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헤아리지 않았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내가 잠든 사이, 낡은 책상 흐릿한 램프 앞에서 몇 번이나 자리를 고쳐 앉았을 남편. 그가 흐린 빛줄기만큼이나 흐릿한 외국어로 더듬더듬 법을 공부해 나가며 느꼈을 막막함 같은 것은 나의 안중에 없었다.


악명 높은 로스쿨의 1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2년의 과정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학점을 잘 받기 위해 3년 과정을 4년, 5년으로 늘려 공부해야 했다. 미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쳐왔다. 나는 이제 마냥 어린애같이 굴 수가 없었다. 나의 뱃속에는 우리의 첫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부족한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남편은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서 지휘를 했고 토요일에는 새벽까지 나와 함께 교회 청소를 했다. 힘들었던 시간들은 세월이 흘러도 잘 잊혀지지 않는다. 만삭의 배를 사이에 두고 씨름하듯 테이블을 닦던 밤. 문질러도 문질러도 빠지지 않는 얼룩과 그 얼룩을 핑계로 눈물을 훔치던 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부터였을까? 청년들은 내가 변했다고 했다.

“언니, 결혼하라며? 행복하다며? 언니 요새 좀 이상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돌이 악사라도 좋다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생들에게,

“살아보니까 그런 재주 별거 아니더라. 너, 잘생긴 사람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고들 하지? 나도 살아보니까 머리에 피아노 이고 살 것도 아니고 돈 잘 벌어다주면 그걸로...”

민망함에 차마 잇지 못한 뒷말에도 동생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언니 진짜 왜 저래??


불투명한 미래, 경제적 위기. 힘에 부치고 머리가 복잡했다. 아기는 태어났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 즈음 남편은 이미 한 번 떨어진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서 또 떨어지고 말았다. 때려치우라고 해놓고… 내 맘이라고 편한 건 아니었다. 남편은 말했다.

“인생은 삼 세 번이라는데, 나 한 번만 시험 더 보자. 한 번 더 보고, 또 떨어지면 그때는 접을게. 그렇게 해도 될까?”

왜 내게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건지 남편도 나도 분명한 이유를 댈 수는 없었지만 나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세 번째 시험을 앞두고 나는 캄캄한 터널 속에 내 던져진 기분이었다. 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내가 아파봐야 타인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법. 치사하게도 정말 그랬다. 외줄 위에 올라 탄 그의 모습이 상상됐다. 행여 잡생각에 빠지기라도 하면 곧장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외로운 싸움. 나는 여느 구경꾼처럼 관망하고 앉아 훈수나 두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아려왔다. 그의 처지를 헤아리게 되자 거짓말처럼 담담해졌다. 시험 결과 따윈 정말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의 눈이, 그가 ‘실패한 시험’이 아니라 ‘실패한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남편은 시험에 실패했지만 나는 사랑에 실패했었구나.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실패, 좌절, 절망 따위는 감싸 안지 못했구나. “괜찮아, 힘들지?”라는 말 대신 “때려치워! 너는 글렀어”라고. “한 번 더 도전해봐, 내가 옆에서 응원할게” 대신, “기대하지 마, 그건 네 능력 밖 일이야.”라고 말해버렸다.


하여, 이는 결국 그가 아닌 내 실패에 관한 글이다. 인생을 좀 살아보니(?) 거기에는 고배의 쓴맛만 있는 것도 아니요, 축배의 달콤함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거기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을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남편의 숱한 실패 앞에 그를 사랑하지 못했다. 더는 떨어질 곳이 없었을 때에야 가까스로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뻔뻔히 실패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글을 쓴다.


남편은 세 번째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뉴욕주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며 겪은 또 다른 차원의 고초(?)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뤄두고,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실패에 관한 글을 짧게 줄여 본다. 거듭 말하지만 나의 실패였다. 남편이 변호사가 되고 취업을 했다고 해서 인생의 꽃길이 펼쳐진 것은 결코 아니다. 알고 보니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은  ‘누가 무엇이 되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실패를 거듭하는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끌어안는 것은 날마다 마주해야만 하는 도전이다. 이 도전에 실패하면 단언컨대 결혼생활은 반드시 불행하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힘들 때나 슬플 때나 한결같이 사랑할 것을 약속한 부부라면, 특히 꿈같은 신혼을 지나 현실의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그들이라면 특별히 ‘실패하지 않길’ 바란다. 시험에는 실패해도 사랑에는 실패하지 않기를. 취업에는 실패해도 사랑에는 실패하지 않기를. 부디 실패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실패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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