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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Jul 14. 2020

프롤로그: 서른아홉,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드라마 제목이 아니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그녀의 말처럼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 첫사랑이야 한 번이라서 아름답지만 삶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에게 한 번이라는 기회는 가혹할 뿐이다. 한 번뿐인 서른아홉이 왔다. 여태 나는 불성실하게 살아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금수저의 편이라는 자조가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별거 안 하고 사는데도 꼬박꼬박 일 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으니 억울했다. 매일매일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야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으면서도 체중계 위에 올라설 때면 또 억울했다. 한 것도 없이 나이를 먹고, 먹는 것도 없이 살이 찐다고 주장하곤 했다. 나와 크게 상관도 없는 세상의 부정과 불공정이 억울했다. 이런저런 부조리를 탓하며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호도해 보려는 건지도 몰랐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겪은 사건을 얘기해야겠다. 나는 문창과(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만 해도 교내 백일장을 싹쓸이하던 나였다. 현미자 국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 커서 작가 돼야지~”

 평소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없는 무서운 선생님이셨다. 그러니 그날 교무실에서 밝은 미소와 함께 내게 던지신 이 말씀은 나의 뇌리에 화석처럼 박힐 수밖에 없었다.


 반면 고등학교 때는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처음에 문학 선생님은 나를 같은 최 씨라고 무척 예뻐하셨다.

“동생~!동생이 답해봐.”, “동생~점심 잘 먹었어?” 부담스럽게 동생이라고까지 부르시면서.

 이육사의 ‘청포도’를 배우던 날이었다. 철없던 그 시절, 사실 나는 좀 삐딱하고 되바라진 학생이었다.

“선생님, 이육사가 왜 이육사인지 설명해 주셔야죠”

선생님은 당황하신 듯했다.

“이육사는 원래 본명이 아닌데.. 264는 교도소에 있을 때 수인번호… 본명은 뭔가요?”

 선생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했고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부터 나를 대놓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토라진 여고생이 빙의라도 된 듯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무시했다. 손을 들어도 내 차례는 오지 않았고 아무리 떠들어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나도 질세라, 흔한 여고생의 개김을 풀장착한 채 문학시간마다 더욱 삐딱해졌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 게시판에 서울 한 유명 대학 주최의 백일장 공고가 붙었다.


   <백일장 문의: 최OO 문학 선생님>


 하필 최 선생님. 나는 용기를 내어 최 선생님을 찾아갔다. 대학 입시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대회가 문학 선생님의 손에 달려있었다. 곁에 선 나를 보고도 선생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선생님….”

 “왜?”

 고개를 숙인 채 던진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백일장이요… 저 한 번 나가보고 싶은데…”

 그때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니~~~~가? 백일장을? 쳇, 야! 교실로 돌아가!”


 청포도가 목에 걸린 것만 같았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모멸감에 치를 떨며 곧장 나는 작가에 대한 꿈을 접었다. 그리고 줄곧 생각해왔다. 내가 문창과에 못 간 건 다 그 선생님 때문이야.


   남의 탓을 하고 살면 사는 게 쉽다. 그렇게 정신승리하며 서른여덟 해를 살아왔다. 서른아홉이 되었고 곧 마흔이 될 거였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마흔은 완연한 중년을 의미했다. 각종 뉴스에서는 40대 암 발병률과 사망 위험성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떠들어 댔다. 지금보다 기대수명이 짧았고, 지금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40대에 접어 들은 어른들에게선 벌써 전장에서 혹사당한 퇴역군인 같은 느낌이났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니까. 실제,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는 35~45세였던 중년기가 약 30년이나 연장되었다고 보았다.(이시형 저. ‘행복한 독종’) 그래도 여전히 40대는 ‘롬곡’이나 ‘이생망’, ‘갑분싸’ 같은 신조어를 '공부해야만' 따라갈 수 있고, '대책 없는' 노후의 대책을 세우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쌓아둔 내공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인생은 40부터, 아니 50부터, 아니 70부터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순식간에 내 코 앞으로  그런 ‘마흔'이 다가왔다. 그간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키웠다. 2009년부터 2020년 7월 현재까지 거의 매일 아침 남편이 먹을 약 3000개의 도시락을 쌌다. 365일을 한결같이 세끼 이상 먹고, 아이들의 세끼를 챙겼다. 그러는 와중…마흔이 코 앞인 거다.


 마음이 쫄렸다. 마흔이라면, 피해자 코스프레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나 자신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은 없다.’

 이 아름답고도 잔인한 문장을 대하며 삶의 자세를 고쳐먹기로 작정하기 까지 깨달은 바가 좀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들을 글로 옮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흔 전 백업>은 마흔을 앞두고 시작한 ‘나'라는 인간의 재정비, 성찰에 관한 에피소드다. 한편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나의 다짐을 공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게다가 열여덟에는 문학 선생님을 탓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이외수 선생은 말했다.


“모든 예술의 길은 비포장이다. 때로는 세인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면서 때로는 지독한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 때로는 사막을 맨발로 걷거나 때로는 가시덤불을 알몸으로 헤치고 예술이 그대를 굳게 끌어안을 때까지 혼자 공복으로 걸어가야 한다. 자신 있는가.”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나는 지금 공복이다(배고파). 적어도 한 가지는 충족되었으니 남 탓은 그만하고 이제 홀로 이 비포장길로 들어 서야 하지 않을까. <마흔 전 백업>은 나에게 또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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