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G Aug 13. 2021

미치게 하기 싫지만 막상 하고 나면 정말 좋은 것들

어제는 분명 방탕하게 지냈는데도 밤이 되니 무척 피곤했다. 일찍 침대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읽는 내 모습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 문장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 책과,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유체 이탈인 건가.

툭!

 모서리가 마빡을 어택하고 나서야 내가 졸고 있다는  알았다. 에이 , 자자. 읽고 있던 책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책이 침대가 아니라 테이블 위에 사뿐히 엎드려 있었다. 책이 혼자 걸어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남편이 올려놓은 것이다. 멈춘 데를 까먹지 않도록 친절히 펼쳐 엎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남편이 이런 일을 대신해주지 않는다면 단언컨대 침대 헤드 보드와 매트리스 사이에서만 족히 다섯 권의 책이 나올 것이다. 베개를 들추면 수백 개의 머리끈이 나올 것이고 침대 밑엔 머리카락을 담은  뒹굴어 다니는 과자 봉지들이 가득할 것이다. 시작이 훈훈한 아침이었다. 남편에게  고마웠지만 늦게 일어난 탓에 도시락은  보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차를 써야 해서 비몽사몽간에 남편을 회사에 내려 주었다. 오후에는 스티브의 바이올린 레슨 때문에 뉴욕에 가야 한다. 마음이 무거웠다. 애들 아침을 대충 먹이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는 미치게 하기 싫은 일들이 잔뜩 있었다.


샤워를 해야 했다. 그러나 샤워보다 스트레칭을 먼저 하기로 한다. 운동하고 샤워해야지 샤워하고 운동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트레칭한다고 막 땀이 나지는 않을 텐데도 하기 싫은 샤워를 그나마 덜 하기 싫은 스트레칭 뒤로 미뤄둔다. 정신은 대충 깨어나는 듯 한데 몸은 아직이다. 떨어져 나가는 잠기운이 아까워 주섬주섬 주워 입고 이불 뒤집어쓰듯 꽁꽁 싸맨다. ‘더 자고 싶단 말이다!’ 눈을 반만 뜬 채로 느릿느릿 요가매트를 깔려는 순간 마룻바닥의 부스러기가 구원처럼 눈에 들어온다. 부스러기가 있으니까 역시 청소 먼저 하는 게 좋겠다.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몸이 조금씩 깨어났다. 마음이 쫄렸다. 결국 언젠가는 스트레칭을 해야 할 것이다. 스트레칭 후에는 샤워를… 해야 할 일들이 꿰어진 굴비처럼 줄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에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 하고 청소기를 제자리에 놓는다.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요가매트를 깐다. 유튜브에서 <다노 TV>를 켜서 매트 위에 눕는다. 매트에 누웠으니 반은 성공이다. 제시 언니의 차분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노 티비의 제시 언니는 나보다 어리다. 그러나 내가 이토록 하기 싫어하는 운동을 매일매일 하고 나에게도 성실히 가르친다는 점에서 나는 그녀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러니까 나이 따윈 상관없이 언니로 모시는거다.


“아침을 상쾌하게 깨우는 눈뜨자마자 스트레칭”


제시 언니의 이 말이 귓가에 울리자마자 매트 위에 드러누운 나의 몸에 자동으로 힘이 빠진다. 동작을 차례로 진행하면서 근육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잠을 잘못 자서 생긴 뻐근함이나 잘 안 쓰는 근육 탓에 굳어져버린 어딘가가 각 동작을 통해 효과적으로 풀리는 걸 느낀다.

스트레칭 하기 정말 잘했다는 감정은 보통 팔을 깍지낀 채 뒤로 쭉 뻗을 때 최대치가 된다. 제시 언니는 “후~”하고 숨을 내뱉으라는데 나는 이 지점에서 자꾸만 “아~!”, “어~여기! 조금만 더!” 같은 신음소리를 반복하게 된다. 몸을 산 모양으로 만들 때쯤이면 나는 이미 몸을 엿가락처럼 늘일 준비가 얼마든지 되어 있다. 몸이 땅을 밀어내는 건지 땅이 나를 밀어내는 건지 모를 정도로 물아일체 상태가 되어서! 마무리 동작이 가까워 오면 거짓말처럼 이 모든걸 그만두기 아까워진다.


스트레칭 후에는 다시 도살장에 끌려가듯 목욕탕을 향했다. 그러나 뜨끈한 물이 온몸을 적시자 곧 샤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 후에는 머리카락에 에센스를 뿌리고 머리를 말린다. 이때 엉키고 젖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는 것도 정말 귀찮은 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뽀송하게 마르고 나면 또 기분이 좋다. 뽀송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느껴지는 청결함, 기름기를 싹 거둬낸 정수리에서 내뿜는 상쾌한 향기!  


샤워나 스트레칭보다 백배 더 하기 싫은 일들을 하나하나 클리어하고 나니 저녁이 왔다. 아무렇게나 맘대로 방탕할 것이라 다짐한 날의 마무리는 뭔가 찝찝하고 불쾌하더니미치게 하기 싫은 일들을 다 해내고 난 날엔 어김없이 뿌듯함과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하기 싫은 강도가 강할수록 완수하고 난 뒤의 기쁨, 뿌듯함도 비례해서 커지는 아이러니다. 게다가 미치게 하기 싫은데 막상 하고 나면 정말 좋은 것들은 대개 내게 유익하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유익한 일은 하기가 싫은가 보다.


가계부를 펼치려는데 테이블 위가 엉망이다. 테이블 정리부터 하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저는 14시간을 자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