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린다. 질려. 어제 저녁에 먹던 국을 오늘 아침에도 먹는 것. 몇 달간 하던 스트레칭을 오늘 또 하는 것. 지난주 입던 옷을 오늘 또 입는 것. 저 책은 어제도 읽었는데 오늘도 읽어야 하는가. 반복되는 총체적인 일들이 너무나 지겹다. 병인 것 같아 병명을 지어보았다. ‘만성지겨움증’. 어떻게 하면 지겹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몇십 년 간 해 온 일을 오늘도 또 하는 수많은 존경스러운 분들이 계신다. 대관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가계부 쓰기와 아침 스트레칭이 자리 잡을 무렵 나는 이렇게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나에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11월은 보란 듯이(누구 보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살았다. 반복되던 것들은 일부러 제외시키고 하고 싶은 것들을 닥치는 대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제 한 걸 오늘 또 하는 게 너무 지겹다. (문득 한 남자랑 사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 <지속하는 힘>을 읽었다.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 저자는 ‘시작하기’, ‘지속하기’, ‘그만두기’의 사이클을 효과적으로 돌리라고 한다. 그래 어쩌면 나는 지금 잠시 ‘그만두기’ 중인지도 모른다. 오늘 다시 가계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 스트레칭을 놓쳤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있다. 나는 정녕 다시 ‘시작하기’로 가는 중인 걸까.
지겨움도 바이러스라면 그걸 없애주는 백신을 기꺼이 맞겠다. 1차, 2차, 부스터까지 꽉꽉 채워 맞을 용의가 있다. 빌어먹을 지겨움병 환우를 위한 모임이 있다면 거기에도 주저 없이 조인하겠다.
“참 성실하시네요”, “정말 꾸준하십니다”, “규칙적인 삶을 사시네요”, “외길 인생이십니다”, “장인정신이 투철하시네요”, “한결같으세요”라는 말은 일생에 들어보지 못하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유전적인 문제인 건지 울 엄마 교육이 잘못된 건지 원인을 찾지 못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잘하고 싶고, 잘 살고 싶은데 말이다.
재미있는 게 너무 많은 것도 뭔가를 꾸준히 해내지 못하는 원인 중에 하나다.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됐든 100가지가 된다면 하루에 하나씩만 돌려해도 3개월이 훌쩍 지난다. 3개월의 주기로 하나씩 돌려 한다면 300개월, 즉 25년이 걸린다. 그러니 나는 장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게 많아 100가지나 되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정말 100가지 채울 수 있다. 내가 꽂혀 사는 것들을 나열해 보자.
올드 바이올린, Luthier의 일, 피아노 코드 반주, 음악 감상, 식물 키우기, 요리(온갖 종류의), 베이킹, 독서, 글쓰기, 교육, 심리, 상담, 영어, 메이크업, 피부관리, 운동, 라디오, 유튜브, 뜨개질, 인테리어, 아이키아 Hack, 조명, 목공, 온갖 수리, 부동산, 경매, 주식, 잔디관리, 정리정돈, 청소도구, 성경, 아프리카, (아주 가끔) 과학, 역사, 철학…
대충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봐도 삼십 가지가 넘는다. 이런 건 그냥 다 ‘관심사’ 카테고리에 처박아 놓고 어쩌다 꺼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저 중에 뭔가 꽂히면 그날은 주로 그것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져 또 다른 걸 찾을테지만 말이다.
‘선택과 집중’의 삶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인가. 이 재미난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짐짓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에 잠긴다.
진짜 좋아하는 것에 선택과 집중하여 살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다른 관심사를 충족시키기. 이것 외에 지금은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무얼 하든 쉽게 질리지 않는다면 이렇게 마음이 나누일 이유도 없었을 터인데. 하고 있는 일에 안정감을 느끼고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비결은 과연 뭘까. 뭘 해도 좀처럼 질려하지 않는 분들에게 그 비법 좀 전수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