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한 남자랑 40년 살면 어떤 기분이야?
삼진씨와 정숙씨의 37년
이따금씩, 아빠와의 와인 한 잔이 별거 없이도 행복한 위안의 시간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잦은 야근으로 늘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딸은 대부분 소파 위에 인어공주 포즈로 잠든 아빠의 모습을 보며 '제발 들어가서 자'를 외치기 바쁘다. 하지만 오늘처럼 삼진 씨가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직행하기 전 집에 도착하는 날은 내 손에 들린 까만 비닐봉지를 보며 눈을 빛내는 그를 마주한다. 딸내미와는 다르게 '맛있는 음식'에 대한 식탐이 전혀 없는 삼진씨와 정숙씨. 그런 그들이 유일하게 부리는 식탐은 바로 딸이 밖에서 사들고 오는 그 무언가다. 그 무언가가 단돈 몇 천 원에 포장해온 붕어빵이라도 무조건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는다.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도 조금이라도 배부르면 소식하는 이 부부에게 딸이 바깥에서 사 오는 것들은 무조건 산해진미처럼 느껴지는 걸까.
제법 춥지 않게 된 3월의 퇴근길, 낑낑거리며 올라온 지하철 밖으로 목삼겹살 구이집이 보인다. 우리 삼진씨가 딸과 함께하는 와인 타임에 안주로 함께하면 좋아하겠다 싶어 기분 좋게 들러본다. 네이비 체크 파자마를 입고 꿈 백화점에 입성하기 직전의 그를 생각하며.
아니나 다를까. 눈을 빛내며 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호기심 어린 눈을 바라보며 그가 다가온다. 정숙씨는 오늘도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혼자 단어 테스트를 하며 나를 반겨준다. 곧 부녀의 와인 테이블이 열린다. 그리고 늘 그렇듯 특별한 주제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로의 일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도 소화되기 전에 다시 일의 세계로 빠져들어있을 삼진씨의 모습이 안 봐도 뻔하다며 혀를 내두르는 정숙씨의 말에 우리 모두 깔깔거렸다. 삼진씨는 왜 보지도 않고 본 척하냐며 '티기'하고 어깃장을 놨고 정숙씨는 안 봐도 뻔하다며 '타카'하고 받아쳤다. 그리고는 말했다.
" 내가 자기랑 산지 3년 뒤면 40년이야. 안 본다고 모를까? "
헐... 소름이 돋았다. 3년 뒤면 40년이라니. 앞으로 그들이 함께 살아갈 세월도 몇십 년 일지 모르는데, 곧 40년이라니. 정숙씨 너무 고생 많았다며 손을 잡아주었다. 진짜 얼마나 고생 많았을까. 나랑 성격 또옥~같은 저 불같은 다혈질의 남자와 40년이라니. 그런 나를 곱게 흘겨보며 감회에 빠진듯한 삼진씨와 정숙씨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휴, 부럽다. 졌다. 징글징글하겠다고 외쳤지만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오래도록 산전수전 함께 겪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부모보다 더 오래 살 맞대고 살아온 남. 그들을 잇고 있는 유일한 물리적 연결고리는 나란 딸내미, 단 하나다.
한 남자와, 혹은 한 여자와 40년 살면 어떤 기분일까. 졸혼하고 싶은 기분일까. 아니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뿌듯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없이 애틋하고 소중하겠지.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다만 내가 대놓고 정숙씨에게 저렇게 물어보지 못한 이유는 하나다. 대답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 기분?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거야. "
큭, 한 글자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저 대답에 쾌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이 관계를... 한국말로는 '가족'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