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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BR Mar 16. 2021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의 성장

그러니 잊지마, 잊지말고 이겨내

닥쳐, 이 고라니 shakiya...


저 예쁜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반전의 언어들. 배우 서예지의 너무 예쁜 얼굴이 박힌 썸네일을 홀린 듯 클릭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서예지가 연기한 고문영 그 자체였다. 이런 스토리의 시나리오와 대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이의 재능이 부러워 몸서리쳐졌던 작품이었다. 사이코 아동문학작가 고문영이 극 중 직접 쓴 걸로 나오는 여러 편의 동화들도, 실제 드라마가 끝난 후 출간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좀비 아이,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 봄날의 개, 미운 개의 새끼 그 외 다수'... 사이코답게 극 중 고문영이 쓴 동화들은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신박한 제목만큼이나 소재 역시 음산하고 무섭기 그지없다. 드라마 속 그녀는 아이 어른 구분 없는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스타작가로 나오지만, 실제라면 아이들이 읽다가 소리 빽 지르고 울고불고했을지도. 하지만 어른들만큼은 그녀의 동화가 주는 묘한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활자 뒤에 감춰진 진짜 메시지를 볼 수 있을 만큼 때가 탔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문영의 동화는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 실제 이 책은 '사이코지만 괜찮아' 드라마 대본을 쓰신 조용 작가님이 쓰시고 일러스트레이터 잠산 님의 그림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드라마에 나온 삽화와 글로 만들어진 동화책이 그대로 출판되었다.


동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매일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던 한 소년이 있다. 잊고 싶은 과거의 괴로운 기억들이 악몽이 되어 매일 밤 소년을 괴롭힌다. 잠드는 것이 너무 무서웠던 소년은 마녀를 찾아가 애원한다. 원하는 건 뭐든지 드릴게요, 제 나쁜 기억을 모두 지워주세요,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마녀는 붉은 보름이 뜨는 밤 소년의 영혼을 가져가는 대가로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나쁜 기억이 모두 사라진 소년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참 이상했다. 악몽을 꾸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소년은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았다. 소년은 마녀를 다시 찾아가 물었다. 나쁜 기억이 사라졌는데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를. 그러자 마녀가 대답한다.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처절하게 후회했던 기억,
남을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았던 기억,
버림받고 돌아섰던 기억.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가는 자만이
더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더 유연해질 수가 있지.
행복은 바로 그런 자만이 쟁취하는 거야.

그러니 잊지 마.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넌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 中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처절한 후회, 상처 주고 상처 받았던 날 것의 기억, 버림받고 비참했던 기억 등.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하는 기억을 지워주는 기계가 있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을 겪어 트라우마만 쌓인 겁쟁이가 되었네 라고 생각했었다. 고문영 작가의 잔혹 동화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의 마녀는 이런 나에게 강한 일침을 날렸다. 잊지 마,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넌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라고. 굵게 잔뜩 꼬인 매듭을 풀기 힘들어서 도망가고 도망가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도망가고 싶은 일들은 매일같이 나타난다.


물론 가끔은 도망이 약이 되는 순간도 있다. 모든 사건이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처음부터 예수님 부처님 아닌 이상에야 모든 고통에 수용의 자세부터 나오기란 쉽지 않다. 고통과 지질했던 순간들은 정말 내 가슴 한 구석에서 나를 강해지고 유연해지게 만들어주는 연료가 되고 있을까.


상처, 고통의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잔인함. 그 감정을 회피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 오롯이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했다. 문득 사회에 나와서 내 자존감을 짓밟아 버리고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말들을 떠올려본다. 또다시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이 악물고 성장했던 모습들도.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이 악몽을 꾸지 않는 대가로 영혼과 진정 행복할 자격을 함께 팔아 버렸던 것처럼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나를 강하게 키워주는 성장통은 너무너무 아프다.




#악몽을먹고자란소년 #사이코지만괜찮아 #어른동화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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