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침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쨍한 파란빛의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가을이 왔음을 깨닫게 되는데요, (진부하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에 오늘은 얼마 전에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영국 작가 JP 덜레이니(JP Delaney)의 『더 걸 비포』는 2017년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와 ‘선데이 타임스’에서 베스트셀러로 소개되었고, 40여개국에서 100만부 이상이 판매된 심리/스릴러 소설입니다.
소설은 너무나 완벽해보이는 집,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의 세입자들-에마와 제인-에게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흥미롭게 묘사합니다. 자세한 줄거리 소개는 책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요. ^^ 소설 속 주인공, 에마와 제인이 차례로 방문하게 되는 교회 건물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머리 위로는 샤드와 치즈 그레이터의 꼭대기 밖에 보이지 않는다.”
런던에 위치한 ‘샤드(The Shard)’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한 95층의 고층 건물입니다. 2012년에 309.6미터 높이로 완공되었는데, 2020년 현재 유럽에서는 여섯 번째로 영국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에요. 샤드를 디자인한 렌조 피아노는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와의 합작으로 ‘퐁피두 센터’ 현상설계에 당선되었던 건축가로, 하이테크 건축을 선도한 인물입니다. ‘하이테크 건축’이란 단어 그대로 ‘최첨단의 기계’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건물을 의미하는데, 계단, 배수관, 가스관, 통풍구 등의 시설과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물 등 그동안 내부로 숨겨졌던 건축 요소들이 모두 외부로 노출되어 있는 퐁피두 센터를 보면 여전히 공사 중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소설에서 샤드와 함께 언급된 ‘치즈 그레이터’는 레든홀 빌딩(The Leadenhall Building)의 별칭입니다. 건물의 생김새가 마치 치즈를 가는 강판, 치즈 그레이터처럼 생겨서 이런 귀여운 별명을 얻었다고 해요. 레든홀 빌딩 역시 225미터 높이의 초고층 건물이라 소설 속 등장인물인 에드워드는 두 건물에 대해 “트로피 빌딩들이죠.”라며 “경멸하듯” 말합니다.
최첨단의 기계 이미지를 보여주는 “으스대는 현대의 거인들” 대신에 에드워드가 에마와 제인을 이끈 곳은 “작고 평범한 교구 교회”, 월브룩(Walbrook)에 위치한 세인트 스티븐 성당(St. Stephen’s)입니다. 이 건물은 17세기 영국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설계한 성당인데요, 영국의 바로크 건축을 촉발시킨 사건은 다름아닌 런던 대화재였습니다. 1666년 9월 2일 일요일 새벽, 푸딩 레인(Pudding Lane) 거리에서 시작된 화재는 며칠 동안 런던시의 3/4를 태워 버리고 나서야 겨우 진화되었습니다. 1만3천여점 이상의 주택뿐 아니라 87개의 성당 건물 역시 소실되었고, 재건의 과정에서 성당 51채를 새로 건축하면서 영국의 바로크가 시작된 것이지요. 51채 중 45채를 렌이 설계했는데 소설에 등장한 세인트 스티븐 성당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를 방문한 에드워드가 말해요. “관광객들은 세인트 폴 성당으로 몰려가지만 그의 걸작은 바로 이 곳이에요.”
렌의 업적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에드워드가 언급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입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호화롭고 웅장하게 꾸며진 세인트 폴 대성당보다 훨씬 자그마한 규모의 세인트 스티븐 성당을 선호하지요. 에드워드의 말처럼 세인트 스티븐 성당은 ‘가장 영국다운 바로크 작품’으로 평가받는 건물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빛’. “대화재 후 런던을 재건하던 사람들은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을 만들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고딕 양식의 음울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 그것이 바로 빛이었어요.”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of St. Peter)의 내부입니다. 육중한 벽체들이 천장 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지요. 건축가이기 이전에 수학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렌은 비잔틴 시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방식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꺼운 벽체로부터 오는 답답한 느낌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안을 고안해냅니다. 무겁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벽들 대신에 독립된 원형의 기둥으로 돔을 받치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렌의 성당은 “무지를 밝히는 계몽주의”, “말 그대로 빛이 전부”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소설 『더 걸 비포』에서 세인트 스티븐 성당은 에드워드의 취향을 대변하는 장치로, 동시에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보여주는 에마와 제인의 각기 다른 반응들을 통해 그녀들의 비슷한 듯 하지만 확연히 다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어요. 어서 이 혼란한 시국이 안정되어 직접 런던의 월브룩을 거닐 수 있기를, “샤드와 치즈 그레이터”를 지나 찬란한 빛이 가득한 “세인트 스티븐 성당” 안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