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검색, 사전을 삼키다» 추천사
2011년 1월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로 참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누구 하나 무미건조한 사람이 없었다. 그중 지금 카카오에 있는 정철 팀장은 단연 돋보인다.
정철 팀장은 옛 다음커뮤니케이션 시절 사전 서비스를 취재하며 알게 됐다. 그전까지 사전은 내게 그냥 사전이었다. 사전은 심심할 때 뒤적이던 책이자, 표지가 두꺼운 책이자, 학교 숙제할 때 가장 먼저 들추던 자료창고였다. 고등학생이 되어선 친구의 전자사전을 탐냈고, 대학생이 되어선 선배들이 '나 공부한다'고 자랑하듯 들고다니는 콜린스를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종이사전을 봤다. 그러고 나서 어느새인가 공부하려고 산 사전을 손대지 않고 웹 검색을 했다. 사전은 어느새 내게 검색이 되었다. 정철 팀장은 내가 사전을 쓰는 방식이 변했다는 걸 일깨웠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사전을 찾지 않았더라?
첫만남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전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던 사전의 존재를 끌어냈는데, 결론은 슬펐다. 지금 사전은 내가 어릴 적 선망하고 무조건 신뢰하던 그 사전이 아니었다. 물론, 옛날에도 사전은 그랬다. 사람을 찾으면 인간이라고 나오고, 인간을 찾으면 사람이라고 나오는 식으로 설명했다. 사전을 쓰며 짜증나던 경험을 털어놓자 정철 팀장은 맞장구치며 사전 편찬하는 뒷얘기를 들려줬다. 이런 게 제일 재미있다. 뒷담화. 모든 일에는 겉으로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기 마련이다. 인터넷 서비스가 그렇고, 책 제작 과정이 그렇다. 그럴듯하고 점잖은 용어로 표현한 것보다 날 것의 이야기가 더 와닿고 머리에 쏙 박힌다.
정철 팀장 덕분에 사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블로터에 다니며 사전 편찬자와 판매자, 서비스 제작자와 좌담회를 할 기회를 만들었다. 안상순 전 금성출판사 사전편찬팀장, 이승재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 언어정보팀장, 장경식 한국브리태니커 이사가 패널로 참석했다. 좌담회는 꼼꼼하게 정리한 책 한 권을 읽는 듯했다. 내가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네 분이서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지금도 이 아이템을 통과한 블로터와, 패널 추천과 섭외를 맡은 정철 팀장에게 고맙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전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지금 세어봤는데 정말 몇 권 안 읽었다. =_=;) 그중 제일 대중적인 건 일본 작가 미우라 시온이 쓴 «배를 엮다»(은행나무, 2013)였다. 사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잘 나가는 출판사에서도 사전 편찬팀은 인건비 까먹는 조직이다. 이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괴팍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을 단어 하나, 문장 하나로 정리하려고 괴상한 삶을 산다. 방망이 깎는 노인이 네댓명 있다고 보면 된다. 소설이었는데 영화화 되어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배를 엮다»를 읽을 즈음 네이버는 사전에 해마다 10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검색 서비스에서 사전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지금의 한성숙 네이버 서비스 총괄이사는 사전이 검색에서 중요한 데이터라고 말했다. 검색이 사전을 대체하는 상황을 이해한 말이었다. 취재하면서, 출판사는 더는 독자적으로 사전을 편찬하지 않는 상황에서 포털, 그중에서도 네이버가 어깨에 한국 사전의 미래를 짊어진 듯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출판사가 아니 한국 출판사를 통틀어 사전에 100억 원을 투자할 여력이 있긴 한가.
사전에 관심이 가고, 취재할수록 (지금은 사전 얘기를 쓰지 않지만) 현대 한국인이 쓴(옛날 얘기 말고)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런 책 한 권쯤 한국에 있길 바랐다. 나는 암담하다고만 여기므로, 지금의 상황을 잘 정리하고 진단하는 글을 기다렸다. 이 바람을 채워주는 책이 나왔다. 저자는 정철 팀장. 제목은 «검색, 사전을 삼키다»이다. 한국에서 한국의 사전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이만큼 정리한 글이 있을까.
«검색, 사전을 삼키다»은 한달음에 읽었다. 사전 덕후로 살아온 정철 팀장이 쓴 자기 이야기이자, 그가 덕질로 닦아온 사전 지식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책이다. 네이버와 다음이 벌인 사전 전쟁의 뒷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위키백과 활동가인 정철 팀장이 쓴 위키백과 얘기도 재미있다. 그리고 기분탓 같은데 내 얘기도 있는 것 같다. 이건 나중에 저자에게 물어봐야겠다. 책에 쓴 주변인의 일화 중에 내 이야기도 있느냐고.
사전이 궁금하고, 네이버와 다음 검색 작동 방식이 궁금한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제목 이미지: flickr @Lizadaly CC BY https://www.flickr.com/photos/lizadaly/2510899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