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쇼 Oct 03. 2015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비둘기

응원해 준 택시 기사님과 구조 도구를 빌려준 편의점 아저씨

오늘 H스퀘어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푸드득 소리가 났습니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나무에 있었습니다. 흰 비둘기와 잿빛 비둘기였는데요.


잿빛 비둘기가 앉은 모습이 신기하여 자세히 보았습니다. 머리가 땅으로, 꽁지는 하늘로 향했습니다. 날개나 다리가 나뭇가지에 걸렸던 건데요. 친구가 곤경에 처해서 흰 비둘기가 곁을 지켰던 겁니다. '그렇구나~' 하고 상황을 파악하고선 '저렇게 있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무섭더군요. 그 비둘기가 처한 상황이 남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저대로 두면 죽을 걸 알면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위에 도구는 없었습니다. 도로를 등지고 좌우로 고개를 돌리니 탭하우스가 밖에 내놓은 철제 테이블와 의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의자 하나를 마음속으로 빌리고선, (문을 닫았더군요) 나무 밑에 놓았습니다. 의자를 딛고 올라가도 비둘기가 걸린 곳은 높았습니다. 나무 가지를 잘라버리면 되겠지만, 길쭉한 가위를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길쭉한 막대기가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긴 막대기를 빌리려고 S동 CU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맘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께서 가게에서 가장 긴 막대기라며 빗자루를 빌려주었습니다.


탭하우스의 의자에 올라 편의점의 빗자루를 비둘기에게 뻗던 친구는 "안 닿아"라고 말했습니다. 한껏 팔을 뻗었지만, 빗자루 끝과 비둘기 사이는 한뼘보다 더 넓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흰 비둘기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았습니다.


이번엔 친구가 육교 밑 구둣집 근처에서 대나무 막대기 3개를 구해와선 "묶어보면 어떨까"라고 말했습니다. 무얼로 어떻게 묶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빗자루부터 반납하러 편의점에 갔습니다. 편의점 아저씨는 빗자루를 건네 받다가 저희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걸 엮게?" 하시더니 가게에서 쓰던 테이프를 얼른 가지고 나오셨습니다. 앗. 저흰 테이프를 살 생각을 했는데;;;; 다행이고 고맙고 그랬습니다.

빗자루보다 한껏 긴 막대기를 비둘기가 나뭇가지와 엉킨 부분에 친구가 대며 밀었습니다. 금세 비둘기가 빠져 나와서 바로 옆 가로등으로 날았습니다. 사진 찍을 새도 없이요.


의자를 탭하우스로 도로 가져다 놓으며 보니, 다리 모양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저희 둘을 지켜보던 택시 기사님은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라고 했는데요. ;;; 실은 여기에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비둘기가 그새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도 했고요.


이 글을 쓰면서, 그제야 택시 기사님이 저희가 하는 일을 쭉 지켜보았고 편의점 아저씨는 무시할 수도 있던 제 부탁을 들어주었단 걸 깨달았습니다. 두 분 다 비둘기가 나뭇가지에서 해방되자 한마디씩 해주었고요. "애썼다." "복받을거다." 구조작전을 수행하는 건 친구 혼자서 했지만, 기사님과 아저씨가 우리와 한 팀이었던 것만 같습니다. 편의점 아저씨가 테이프를 막대기에 돌돌돌 탄탄하게 말아주지 않았다면 비둘기를 나무에서 빼낼 수 없었을 겁니다.


비둘기를 구해 준 친구와 빗자루를 빌려주고 테이프로 막대기를 길게 묶어준 아저씨, 옆에서 응원한 택시 기사님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곤경에 처한 비둘기를 모두 한 마음으로 구했다고 생각해요. 뭉클한 마음에 일기 쓰듯 글을 썼습니다.


그 잿빛 비둘기가 옆에 있어준 흰 비둘기와 즐겁게 지내면 좋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