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쇼 Nov 12. 2015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선생님과 제자

기간제 교사인 친구랑 평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난 이번주 수목금, 다음주는 화요일이랑 금요일 빼고"


"잠깐, 야자하는 날이 있어서. 야자 감독 해야 해"


"으잉! 그거 해야 하는 거야? 초과 수당은 나와?"


"1시간에 5천원?"


"그럼 최저임금보다 적잖아-!"


"확실하지 않아. 호봉에 따라 다르고. 근데 정확하게 얼마인지 잘 모르겠어. 다른 선생님들도 잘은 몰라."


"야, 그걸 안 물어본다고?"


다들 묻지 않는단다. 초과근무 수당이 얼마인지를. 어떤 분위기일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잠깐의 대화 속에서 떠오른 이야기 하나. 몇 년 전 얘기다. 또 다른 친구가 학교 선생님이 되고 나서 만났는데 "전교조하는 선생님들은, 거침이 없더라. 교장 선생님 말하는 데에 얘기하고"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선생님들. 그런 분위기. 그래서 내가 자랄 때에 선생님들이 딴죽 거는 아이를 핀잔줬나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문회비를 걷는단 말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동문회비를 왜 내야하나"고 했더니 담임 선생님을 얼굴을 붉히며 잘 알지 못하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했다. 그말을 할 때 그 선생님의 표정이 엄청 굳었다. 그때엔 내가 말실수한 거라 여겼는데 지금와 생각하면 내가 내는 돈이, 어떤 용도로 누가 계획을 세워서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한 게 당연한 거고, 돈 걷는 측은 그걸 밝히는 게 당연하다. 이 당연한 물음에 그 선생님은 입을 닫았다. 당연한 걸 물었다가 혼난 기억.


짧은 와중에 이때 일이 떠오르면서 나는 친구에게 "선생님들이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자기 몫 주장하는 걸 안 가르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자라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라고 말했다. 내몫을 주장하지 않는 선생님과 그 제자들.


대학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고 나서 내 몫을 챙기는 게 참 어렵고 어려웠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내 권리는 얼마나 큰지 또는 작은지. 배운 적 없고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내가 손 뻗을 수 있는 범위에서 보고 듣고 읽은 건,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다'와 '일하는 고마움' 이런 거였다. 이런 분위기에 억눌렸다. 바보 같았다. '당했다'와 서글픔을 하나하나 느끼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구나'를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깨달았다.


이런 내 개인의 경험과 기억 때문에 울컥해 친구에게 "선생님이 애들한테 노동자로서 자기몫 요구하는 걸 가르쳐줘야 우리처럼 안 되지~"라고 말했다. 담담하고 덤덤하게 그 친구 왈 "그래서 애들한테 송곳 보라고 말했다".  그게 애들 눈높이에서 할 수 있는 조언이었겠지.


그 친구가 회사 아니 학교에서 내 노동의 대가는 얼마요?! 라고 묻기 어려울 거다. 평소에 그 상황을 푸념조로 자조섞인 말투로 얘기하던 그 아이를 나는 배려하지 않았다. 내년, 내후년을 기약하지 못하는 기간제 교사인데 분위기 쌔하게 만들 말을 어떻게 하겠나. 선생님들도 바람 앞의 등불이다. 나도. 우리도. 그래서 한국이 슬프다.

작가의 이전글 성수에서 만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