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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Yoo Jun 05. 2020

불완전한 문장들 - 보드게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작은 보드게임 워크숍이 열렸다. 룰 마스터인 남편은 참가자들의 성향과 관심사를 수집하여 보드게임을 큐레이션 해갔다. 우리는 할루젠(할리갈리/루미큐브/젠가)과 같은 파티게임으로 보드게임을 소비하는 시대를 지나왔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함의 게임을 넘어, 친목도모나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으로의 게임을 넘어 하나의 완벽한 세계가 담긴 스토리로의 여행으로서의 게임을 체험했다.


1) 아그리콜라: 농장 주인이 되어 밭을 일구고, 가축을 키우는 게임. 식구를 먹여 살릴 음식을 수확 단계에서 구해야 하는데 이에 실패하면 구걸을 해야 한다.

2) 팬데믹: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치료제를 개발하여 전염병을 근절하는 게임. 각자의 직업이 주어지며, 각 직업의 주특기를 활용하여 플레이어 전체가 협동하여 게임의 목표를 달성한다.


새로운 사람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 새롭다.


1.

우선 아그리콜라와 같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게임의 경우 자신의 성격이나 패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구들이 밥 굶지 않게 식량부터 확보하는 스타일, 가능한 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을 많이 창고에 쌓아두는 스타일, 다른 플레이어가 손대지 않은 패턴을 개척하며 게임을 즐기는 스타일, 확장보다는 견고하게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데 몰입하는 스타일. 현실세계에서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게임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플레이 스타일을 지켜보는 재미와 나의 스타일을 분석해보는 재미.


2.

룰북을 작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봤다. 보드게임의 최종 소비자는 상자 한 박스만을 받게 된다. 룰 마스터가 곁에 없다면 룰북을 정독한 후 게임의 룰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꼼꼼하게 이해시키고 싶어서 룰북이 너무 길어져도 안되고, 자신이 안다는 가정하에 너무 많이 생략해도 문제다. 결국 무엇을 덜어낼 것이냐의 문제인데, 장비치 작가와 이야기하다가 이것은 모든 일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미술작품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작가가 하는 고민, 영화를 관객과 마주하기 전까지 감독이 하는 고민, 수업 커리큘럼으로 참가자와 만나기 전까지 강연자가 하는 고민, 모두 무엇을 얼마나 덜어낼 것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룰북은 특히 미사여구를 제외한 논리의 정수에 가까운 텍스트이니, 얼마나 일목요연하게 많은 것을 덜어내고 필요한 것을 보기 쉽게 정리해야 하는 일인지를 다시 상기했다.


3.

보드게임이 재미있는 것은 게임마다 전달하는 테마가 하나의 세상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게임은 룰과 테마로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진입시킨다. 농장주인이 되었다가, 방역관리자가 되었다가, 화성 개척자가 되었다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니까. 그런데 그 세계로의 진입이 영화를 플레이하고 지켜보는 식의 수신자의 역할이 아니라, 직접 선택을 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인터렉션이 포함된 활동이라는 점에서 좀 더 그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비디오 게임과 달리 구성품을 손으로 촉감하고, 오프라인에서 만나 타인과 협상하고 거래하고, 에너지를 나누는 일을 한다. 아날로그적으로 에너지가 흐른다는 것이 보드게임의 큰 장점이자 매력같다.


4.

남편은 보드게임을 만드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게임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게임을 직접 해보는 것, 그리고 직접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게임을 설명하고 룰을 알려주는 룰 마스터의 역할 역시 무척 즐기는 것 같다. 자신이 만든 보드게임을 누군가 재미있게 플레이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로 타인을 초대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심지어,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아닌 다른 작가가 만든 게임을 소개하고 그 게임을 몰입하여 플레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무척이나 즐겁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구축보다, 세계로의 초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새로운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 보드게임을 즐기는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보드게임이나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런 장문의 글을 쓰다니. 보드게임 작가의 아내로 7년을 살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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