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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Apr 09. 2021

오늘밤 나는 어디서 잘까?

책을 읽다.


오전에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었다. 필사를 하고 싶을 만큼 좋은 글들이었고, 다시 읽기로 마음을 먹고 책장을 덮어 두었다. 그리고 전기가오리 배송이 왔고, 책 제목이 ‘야간 노동’인 것과 ‘다윈이 철학에 미친 영향’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간 노동’은 아마 정희진의 책에서 ‘무명용사의 묘지’라는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빠를 생각나게 하는 제목이기도 하고. 

조금 들춰서 읽는데, 반도 읽기 전에 마음이 뻐근하다. 야간 노동, 초과 노동 끝에 과로사, 사고사 한 이들은 대게 나이가 많거나 외국인이다. 연극을 하는 내내 내가 노년에 노숙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었다. 지금도 그 불안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나에게는 불안이 누군가에겐 삶이고, 노동이며 그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그 불안이 자본주의 사회를 먹여 살리지만 사실은 다 같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위해 애쓰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전통적인 의미의 기쁨인 자기 극복이 아니라 성공을 향한 맹렬한 욕망에 방해되는 모든 사회적 연계를 토막내는 기쁨-이 –보편적인 생활양식-으로 인식된다.(나쁜 사람에게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 p.197) 그리고 그녀는 또 -인명 사고를 생산하고 방치하는 내전의 시대인 동시에 장수의 시대-라고 쓴다.(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p.202)

그 책 몇 장 뒤에 ‘나는 무엇을 먹을까?’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법정 스님이 옮긴 ‘숫다니파타’라는 경전에 대한 것인데, 오후에 책을 다시 보다가 그녀가 옮겨놓은 글귀에 마음이 멈췄다. 

나는 무엇을 먹을까?

나는 어디서 먹을까?

어젯밤 나는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오늘밤 나는 어디서 잘 것인가?

집을 버리고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네 가지 걱정을 극복하리라.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 p.209)      

라는 글귀인데, 정희진은 수행을 넘어선 세월호 피해 아버지의 단식을 말하고, 수행은커녕 자기 입에 대한 고민도 없이 내뱉기만 하는 자들의 악취나는 ‘말’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런데 나는 저 글귀에 또 보리 생각이나 얹었다. 보리와 켄넬에 대해서, 며칠 동안 집 없이 떠 돌아다녀야 하는 내 처지에 대해서. 너무나 가볍고 단순하기만 한 발상이지만 그래도 첨언을 해 보면, 보리가 켄넬을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인식한 걸 아침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집 공사를 앞두고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곧 병원도 가야 했기에 이동용으로 켄넬 적응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 전에도 켄넬을 이용한 적은 있지만 잠깐씩이었고, 차에 켄넬이 있는 상태로 태우려고 해 봤는데 실패해서 줄곧 켄넬 없이 차를 타고 다녔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엔 보리의 다리뼈가 완전히 붙지 않은 상태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숙소에 가게 되면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도 켄넬이 필요할 것 같았고. 그래서 켄넬을 가지고 들어와 몇 번 훈련을 했더니 금방 익숙해져서 혼자 쉴 때도 켄넬에 들어가서 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쉽게 적응할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대견하고 신기했다. 

켄넬에 적응을 잘해서 이웃에 있는 반려견 동반이 안 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라고 말씀해 주신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보리가 켄넬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방에 나와 있어야 했다면 와서 지내라고 말씀해 주셨어도 선뜻 갈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보리랑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이틀을 잘 있었다. 낯선 공간이었는데도 집과 가깝고 마당까지 몇 번 와 본 곳이라 그랬는지, 초반에 나랑 계속 같이 있어서 그랬는지 보리도 잘 있었고, 오히려 작업실보다 더 편해하는 것 같았다. 초반에만 조금 냄새 맡고 돌아다니고 줄곧 켄넬에 들어가서 쉬었고. 

첫날밤을 무사히 잘 보내고 둘째 날은 아침부터 작업실에 와 있었는데, 한 시간 정도 작업실에 혼자 있어서 그랬는지 작업실에 다시 들어가기를 너무 싫어해서 실랑이하느라 애도 먹고 뛰어 나갈까 봐 식겁하기도 했다. 반면에 저녁에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마치 빨리 문을 열어 달라는 듯 문 앞에 얌전히 앉아 있고, 계단도 편하게 안고 올라갔다. 마지막 날 아침엔 파트너가 일찍 보리를 데리고 나갔는데 쉬도 하고 응가도 해서 다시 게스트 하우스에 데려다 놓았다. 체크아웃 전까지 나랑 얌전히 잘 있다가 시간이 되어 짐부터 옮기고 보리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 우리 짐이 있는 캐리어를 들고나갔다가 다시 왔을 때는 보리가 켄넬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는데, 켄넬을 옮겨 놓고 다시 오니 게스트 하우스에 사는 강아지가 방문 안에서 짖고 있고, 우리가 묵었던 맞은편 방에 들어가자 보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조금 불안해 보였다. 아마 내가 나가고 보리가 뭔가 소리를 냈으니 맞은편 방에 있던 강아지도 짖었을 것이다. 보리가 켄넬을 편해하는 것 같아서 켄넬을 먼저 옮겨 놓고 보리를 데려다가 놓으려고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켄넬이 없다고 단박에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마 옆방에서 개가 짖으니 더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집 공사 때문에 떠돌이 상태가 되어서도 같은 글을 읽으며 눈으로 보고 말았는데, 고작 사오일 정도 쓴 켄넬이 없다고 금세 안정을 잃어버린 보리를 보고 나니 그 글귀가 마치 우리의 처지와 딱 맞는 듯 느껴졌다. 쫄보 보리. 그리고 나는 집을 버리고 진리를 배우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좀 더 어릴 때는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히피나 집시처럼, 아니면 세계 여행을 다니고, 내 집이 없어도 세상 어디든 내 집인 듯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게 멋지게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그런 불안을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베이스캠프가 필요하고, 베이스캠프가 없거나 약하다는 느낌을 받으면 쉽게 불안해했다. 여행지에서는 숙소가 먹는 것이나 다른 경험들보다 중요했다. ‘이따 어디서 자야 할지’ 정해지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하게 즐기지를 못했다. 모험가와 히피를 동경했지만 나는 모험가가 될 수 없었다. 모험가가 될 수 없다니 그 사실이 지금도 아쉽다. 모험가가 될 수 있다고,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인생에서도 모험을 시작해버렸지만 그래서 매 순간이 불안한 것 같다. 

한 가지 위안이 된다면 정희진이 말한 것처럼 숫다니파타의 그 글귀는 -먹고 자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세상-이라는 것이다.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사람이 먹고 자는 네 가지를 극복하기란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운명의 모험길에 올라 있지만 내 잠자리와 먹을 것은 물론 보리의 먹을 것과 잠자리도 고민해야 하는 걱정에 메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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