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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20. 2021

담벼락 아래 자전거

제주 살이

맞은편 담벼락에 내가 어릴 때 타던 자전거와 꼭 닮은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레스포, 안장이 길고 프레임이 작은 네발 자전거. 옆집 아저씨가 오래된 짐들을 정리하시는 모양이다. 방충망도 나오고, 먼지 쌓인 것들이 큰 트럭 뒤 담벼락 아래 놓인다. 길 건너에 세워진 중장비처럼 투박한 트럭이 뭘 하러 온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었는데, 자전거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구나. 창고라도 비우는 모양이었다. 


손님 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밖을 내다봤다가 그 자전거를 봤는데, 먼지 쌓인 모습이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내가 실제로 그 자전거를 갖고 있었던 건 아주 오래전인데도. 제주 중산간 마을 덕수리에서 20년 전에 타던 자전거와 닮은 자전거를 만났다. 그 모습을 사진 찍어 둬야 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는데, 손님을 두고 나가도 되는지 얼른 판단이 안 섰다. 그 사이 다른 손님이 또 들어왔고, 길 건너편에서는 트럭을 타고 온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다른 잡동사니들과 함께 자전거를 차에 싣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서 당장 손님들을 제치고 밖에 나가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를 필요도 없었다. 자전거는 잠시 나타나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떠났다. 사진을 찍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은 '진짜 내 자전거도 아니었는걸, 다른 자전거를 찍어서 뭐해'라고 생각하니 달래 졌다. 


어쩌면 오늘 오랜만에 날이 화창해서 먼지 쌓인 자전거도 괜히 더 예뻐 보이고 옛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산방산이 보이는 예쁜 동네에서 늘 낮 동안을 보내면서도 좀처럼 사진 찍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겨울에 눈이 아주 많이 와서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을 때만 사진과 영상을 조금 찍었다. 초여름에는 옆집 올레 입구에 능소화가 아주 멋지게 펴서 손님들이 사진을 찍느라 종종 없어지기도 하고, 웨딩 스냅 샘플 촬영을 하러 가던 팀이 급히 차를 세워 사진을 찍어가기도 했었는데, 나는 한 번도 사진 찍을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 담벼락에 자전거가 나타나자 그 사진을 꼭 찍어야 할 것처럼 조바심이 난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어도 그랬으려나?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자전거 사진을 못 찍은 대신 하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요즘 내내 흐리고 습도가 높아서 힘들었는데, 오늘은 더운 날씨지만 오랜만에 쾌청하다. 바람에도 약간 시원함이 느껴져서 계곡에서 물놀이하기엔 약간 추울 것 같은 날씨다. 제주도에서 이런 날씨를 만나기란 생각보다 드물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씨다. 고민이 있어도 날씨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날씨다. 


자전거가 서 있던 담벼락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옆집 올레. 여름이 깊어지면서 꽃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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