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보리 키우는 이야기
비가 마구 쏟아진다. 천둥이 치는가 싶더니 빗소리가 후두둑 후두둑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두두두둑 하다가 금세 쏴아아아아아 하고 내렸다. 나가보니 번개도 번쩍거리고 마치 세트장에 비를 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흐리고, 호우주의보가 내렸다고 하더니 늦은 저녁부터 이렇게 갑자기 퍼붓는 모양이다. 천둥소리도 거세고, 빗소리가 마치 폭포 소리 같다.
조금 전에 보리 쉬를 해 주러 나간 짝꿍과 보리가 후다다닥 뛰어 들어왔다. 빗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봤다가 빗줄기가 세지길래 우산을 들고나간 나와 마당 입구에서 만나 같이 뛰어 들어왔다. 수건을 꺼내 주고, 저녁에 씻기고 말려서 보송했던 보리도 다시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보리를 닦아주면서 아이비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 본 아이비의 목줄은 핑크색이 거의 없이 흰색이었다. 용수리 살 때 우리가 사다가 해준 목줄이었고, 처음엔 붉은색이 반짝거릴 정도였다. 괜히 튼튼한 목줄을 해 줬다고 후회도 했다. 도망도 못 가게 튼튼한 목줄을 해 줬다고. 아이비는 가출을 했다가도 집에 다시 돌아오는 아이였다. 집을 나와 우리가 살던 집에 갔고, 우리가 없으니까 어디를 헤매다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그 집에 살던 무무도, 보리도, 이렇게 비가 올 때면 꼼작 없이 젖어 있었다. 작년에도 이렇게 비가 온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올해 유난히 비가 거세게 오는 것 같다. 무서울 정도로.
짝꿍이랑 같이 후다다다닥 뛰어 들어오는 보리가 귀여웠다. 얼마 전에도 나랑 산책을 나갔다가 비가 많이 와서 뛰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오늘처럼 무섭게 천둥이 치진 않았지만 빗줄기가 세서 몇 미터 안 되는 거리에도 쫄딱 젖었었다. 처음에는 보리가 비가 와서 신나게 뛰는 것 같더니, 점점 비가 세지고 집에 가까워지니까 집에 빨리 가려고 뛰는 것 같았다. 그동안 개가 비 맞는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별로 신경 안 쓰는지 내심 궁금했었는데, 사람하고 비슷한 것 같다. 사람마다 차이도 있고, 비를 맞으려고 맞으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래도 축축하게 젖고 나면 번거롭고, 춥다. 비 맞는 것도 곧 따뜻하게 씻을 수 있을 때 좋지, 그렇지 않은 상황이면 당황스럽기나 할 뿐이다. 밖에 있는 개들은 비를 맞았다고 들어가서 씻을 수 있는 곳도 없고, 말릴 곳도 없다. 그저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개들이 사람처럼 지낸다고 행복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모든 동물들이 자기 기준에서 너무 춥거나 더운 것이 힘들 것이고, 음식이 부족하면 배가 고플 것이고, 다양한 질병과 위협으로부터 피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개가 꼭 인간과 같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개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 살도록 길들여져 왔고, 사실 세상엔 인간을 피해 살 수 있는 곳도 별로 없다. 인간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인간 때문에 위험해질 것이다. 개가 인간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그 개들을 보호하는 것도 개들을 길들여온 인간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리와 살면서 보리에게 적절한 잠자리와 음식과 활동을 제공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보리를 사랑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게 내가 책임지기로 한 생명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보리 키우는 이야기’는 보리 이야기보다 내가 책임지지 못한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공산이 크다. 보리를 보면 아이비 생각이 나고, 아이비의 새끼들 생각이 나고,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다른 개들이 생각나고, 고양이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늘 그렇다. 보리가 편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보리가 이전에 묶여 있었을 때 어떻게 누워있었는지 생각하게 되고, 밥을 먹을 때면 늘 굶주려 있어서 때로는 간식 주기가 무섭기도 한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배고픔이 동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게 된 것 같았다. 귀엽고 친절하고 사랑스럽던 강아지가 배가 고플 때는 먹을 것 앞에서 본능만 남아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배가 조금 부르면 눈빛이 달라졌다. 만져주다가 갈 때면 늘 아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보리가 우리와 같이 살지 이제 일 년이 막 지났다. 보리와 우리의 관계는 매일 조금씩 변하는 느낌이다. 신나는 산책을 다녀오면 돈독해지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애틋해지고, 아침에 늦잠을 같이 자고 일어나면 끈끈해지고, 목욕을 하고 나면 데면데면해지고, 산책 가자거나 놀아달라는 요구를 무시할 때면 애증이 오간다. 간식을 줄 때면 사랑으로 가득 차고, 토핑이 없다고 밥 먹기를 등한시하면 차갑게 식는다. 쓰다 보니 롤러코스터 같은데, 이런 일상들이 쌓이고 쌓여서 일 년에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보리가 우리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전에 불안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니라, 지금이 더 온전히 편안해진 느낌이라고 할까. 교통사고가 난 뒤로 집에 오랫동안 함께 붙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전에도 ‘임보’를 한다고 했을 때랑, 아이비와 아이들을 데려왔을 때 입양하기로 마음먹은 다음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이비와 아이들을 다시 데려다주고, 수수도 떠난 다음이랑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보리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으려면 만져주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비가 생각난다.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지 데려오려고 마음을 먹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보리도 스킨십을 좋아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는 것을 싫어했다. 익숙하지 않은 터치여서 일수도 있고, 뭔가 불안한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와서 안기는 게 자연스럽고, 청소기도 거의 안 무서워하고, 드라이기도 덜 무서워한다. 우리도 많이 변했겠지만, 보리가 여전히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는 게 고맙고 신기하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데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개들이 너무 많다.
개가 마음을 열고, 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채 ‘개를 키운다’고 생각하는 인간도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