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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an 25. 2023

마르세유의 풍경마다 의미가

영화 후기 _ 스틸 워터

여운이 많이 남아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주인공인 빌은 실제로 봤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인물이다. 영화 속 그의 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것을 망치는’ 사람이니까. 아마도 트럼프를 찍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고, 총을 두 자루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며, 죽은 아내의 짐들을 보관해 놓은 창고에 비용을 내지 않아 딸이 엄마의 물건을 하나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백인 하층민’이다.


석유시추 현장의 일거리가 없어 건설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일하던 빌은 프랑스로 떠난다. 그가 왜 프랑스-마르세유로 왔는지는 호텔에서의 시끌벅적한 하룻밤이 지난 다음에 알게 된다. 감옥에 있는 딸의 면회를 온 것이다. 늘 기도 끝에 언급하던 엘리슨이다. 딸이 왜 감옥에 있는지도 차차 나오는데, 아빠에게는 내용도 말해주지 않고, 변호사에게 전해 달라는 딸의 편지를 통해 밝혀진다. 빌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해서 마르세유에서의 첫날밤 호텔에서 만났던 버지니에게 부탁해 내용을 알게 되고, 딸의 속마음을 알게 돼 충격을 받지만 그녀가 무죄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직접 나서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프랑스어도 하지 못하는 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시피 하고, 사설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딸이 말한 범인 ‘아킴’을 직접 찾아보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다는 동네는 아랍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치안이 좋지 않다. 빌이나 버지니 같은 백인이 해질 무렵에 그 동네를 가는 것 자체로 위험할 수 있는 동네다.

혼자 아킴을 찾으려던 빌은 그 동네에서 린치를 당하게 되고, 사실을 알게 된 딸은 제발 나서지 말아 달라며 빌을 향해 참아왔던 모진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빌은 버지니의 집에서 지내며 마르세유에 머물고,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며 계속해서 아킴을 찾으려 노력한다. 자신이 아킴을 잡을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소소한 일상이 생긴다. 버지니의 딸인 마야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고, 공구들이 있는 지하실에서 각각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때로 서로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그게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했던 앨리슨이 하루 동안 밖에 나올 수 있게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빌은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엘리슨의 마르세유에서의 생활이나, 생각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고, 엘리슨은 버지니 가족과 살아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본다. 빌은 무척 빨리 지나간 하루를 아쉬워하는데, 감옥으로 돌아간 엘리슨은 그날 자살을 기도한다. 엘리슨은 감옥에서 다시 회복하며 나아지고, 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지니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그중에 다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다시 상황은 복잡해진다.      


위와 같은 줄거리가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줄거리도 줄거리이지만 나는 영화 곳곳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인물들, 장소들, 말들과 같은 조각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마치 감독이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이용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빌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전형적이라는 점이 그렇고, 마르세유라는 도시를 묘사한 방식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마르세유라는 도시를 잘 모르니 깊이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마르세유에서 빌이 만나는 인물들도 상당히 상징적이다. 연극배우를 하는 버지니와 그녀가 함께 일하는 연출과 그녀가 출연하는 -난해한 듯 하지만 실상은 그저 별로인- 연극, 승산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려는 변호사, 빌이 수사를 의리 하기 위해 만나는 전직 형사, 인종차별주의자인 바 주인, 그리고 아랍인들이 모여사는 동네와, 버지니의 대모가 사는 언덕 위의 동네. 모든 것이 상징적이어서 어쩌면 그 문화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빌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과연 그 역할을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연기하지 않았어도 그 인물에 이입하고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무식하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 사고를 치기 일쑤인 데다, 가족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다. 그가 마르세유에서 적응하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상한 남자들한테 매력을 느끼는 버지니를 만난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삼 배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기에 그 캐릭터에 더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사실은 호감을 갖고 보기 시작했지만, 영화 초반에 소개되는 빌의 모습은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거두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게 될 정도였는데, 너무나 전형적인 백인 하층민 남성의 모습(나는 사실 그런 인물을 실제로 알지 못하지만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전형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이었고, 작품에서 그런 인물을 설정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었고, 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인 배우-맷 데이먼 인 것 또한 의도적인지, 아니면 그냥 좋은 배우를 쓰고 싶었던 감독의 실수인지 조금 헷갈렸던 것이다. 아마 그 두 가지가 복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트럼프에게 투표할 것 같거나, 투표를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인물이며 가족에게도 믿음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사는 인물이며 가족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인 것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인물인 것이다.


초반에는 딸에게 조차 믿음을 주지 못하는 인물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 단지 배우가 맷 데이먼이라서 그런 것인가, 하고 경계를 하고 봤는데, ‘제이슨 본’이 보이던 빌의 뒷모습은 점점 낯선 나라에서 감옥에 갇혀 있는 딸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조금쯤은 행복해져도 좋지 않을까 응원하게 되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순간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까 계속 조마조마하기도 했다.(아마 이 영화가 서스펜스로 분류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르세유에서 빌이 도움을 받게 되는 인물이 ‘연극배우’인 것도 의도가 있을 것이다. 빌은 딸에게 그녀가 ‘무슨 배우(sort of an actress)’라고 하고, 앨리슨은 그에 대해 비웃는 태도를 보이며 그녀가 연기하는 걸 봤느냐고 묻는다. 내가 연극을 했기 때문에 더 의미부여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낯선 도시에서 빌을 돕는 유일한 인물이 연극배우인 것은 의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 그 직업으로 하여금 그녀가 가진 사회적 계층이 보이고, 삶에 대한 태도를 일부 짐작할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빌과 같이 살 수 있었던 이유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짐작하면서 마르세유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에서 보여주는 마르세유의 또 다른 모습은 내가 그 먼 곳까지 여행을 가더라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곳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아름다운 바다가 있고, 사람들이 휴양을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민자들이 모여 살며 무법지대처럼 된 곳도 있을 곳이고, 높은 언덕에서 아름다운 전망을 즐기며 사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마르세유의 모습이며, 그런 것은 여행으로는 알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모습을 영화 한 편으로 조금씩 맛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사건을 영화로 다룬 것의 의미가 있겠지만 내게 인상을 남긴 것들은 위와 같은 장면들이었다. 빌과 앨리슨은 오클라호마에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인사를 받지만, 환영식에 참가한 인사들은 앨리슨이 감옥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지역의 유지들이다. 집에 돌아온 부녀는 일상으로 돌아온 듯 하지만 그들이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기도, 모든 게 바뀌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터 몰입이 잘 되진 않았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빌은 살이 쪘지만 제이슨 본처럼 보였고, 직장을 구하러 다니거나, 어머니인지 장모인지 헷갈리는 노모와의 대화도 맥락을 알기 어려웠다. 끼니때마다 등장하하는 앨리슨의 존재도 짐작할 수 없었고 왜 갑자기 프랑스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모든 게 그럴 만했다. 물론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도와줄 버지니 같은 인연을 만나는 건 정말 영화 같은 일이긴 하지만.. 잠시나마 평화로운 그의 일상을 보며 마음을 놓고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지만,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아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모든 장면에 의미가 있었고, 내가 놓친 것도 많은 것이다. 그 많은 의미와 의도를 담으며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해 냈고, 하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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