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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Feb 08. 2023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을 읽고 쓰는 글


배수아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달걀과 닭’이란 책과 그 책의 낭독회를 통해서였다. 

난해한 문장과 그의 읊조리는 목소리 덕분에 내게 그 낭독회는 너무 지루했고, 내게 남은 작가의 인상은 너무나 몽환적인, 내가 읽기에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책이 예뻐 구입했다가 아직도 읽지 못한 ‘불안의 책’이라는 책은 ‘불안의 서’라는 제목으로 먼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몇 권 있고, 배수아 작가의 것도 그중 포함되어 있는데 내 맘에 드는 표지 디자인의 책이 그가 번역한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도 혼자 있을 때 만났다면 아마 들춰보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유목민이나 몽골 여행에 관심이 있다 해도 스텝 평원에 구름이 깔린 흑백 사진과 갈색이 어우러진 표지 또한 좀처럼 관심조차 바라지 않는 모습이어서 표지를 흘낏 보고는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처음 만나 호감을 갖게 된 지인이, 작가가, 여인이 이 책을 들어 보이며, 내가 배수아 작가의 작품에 대해 가진 인상에 일견 동의하듯 끄덕이며, 그런데 이 책은 재밌다고, 보통의 여행기 같지 않지만 정말 재밌다고, 자신도 몽골에 다녀왔는데 몽골의 모습은, 풍경은, 느낌은 (그가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제주도와 닮았다고 얘기해 줘서 홀린 듯 책을 받아 들고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게 책을 빌려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책은 다른 책들보다 조금 얇고 글자는 조금 큰 듯해서 엄숙해 보이던 표지에서 느낀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고,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바로 펼쳐보았다. 그리고 왠지 입술을 실룩거리며 1/4 정도를 읽어버렸고, 이 책과 작가에게 왠지 정이 들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에 편히 몸을 눕히고 있으면서도 왠지 낯설고 혼란스럽고 이국적이고 고요한 울란바토르 시내를 걷는 느낌이었고, 스텝 벌판의 황량함을 바라보며 당황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난데없는 문장에 꽂혀 버렸는데, 그것은 추위에 대한 것이었다. 몽골 여행을 준비하며 작가는 꼼꼼한 안내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추위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라는 충고를 가볍게 여기고 방한 장비를 허술하게 챙겼다. 쉽게 감정이입을 하는 나는 그의 선택이 너무 안타까웠으나 실제로 나라면 어땠을까 쉽게 장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리하여 ‘분노하는 바람'의 땅인 알타이(p.70)-그래서 제주도와 비슷한 모양이다. 에서 그는 늘 추위와 함께 하는 듯 한 인상인데, 책의 초반에 ‘ 추위는 배고픔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욱 지독하고 원초적인 고통일 수 있다는 것도 그곳에 가서야 깨달았다.’(p.70)라고 적는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을 보며 길에서 추위를 견디고 있는 동물들을 떠올렸다. 자유의지로 조금이나마 안전하거나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수도 없이 줄에 묶이거나 철장에 갇혀 바람 한 점 피할 수 없는 동물들. 그리고 이런 동물들은 추위뿐 아니라 배고픔도 견뎌야 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난로를 켜고 침대에 누워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 몸도 고통에 놓여 있으면 덜하려나.. 그러나 인간은, 나는 안정과 따뜻함과 깨끗하고 편안한 일상 같은 걸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던가. 결과적으로는 그 (별 것 아닌/ 소박한) 욕망이 세상을 위험하고, 더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그래서 유목민들의 삶을 ‘체험’하고자 하는 유럽인들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찍이 산업사회를 이룩한 ‘주류’ 문명에서 온 방문객들. 책 속의 ‘수아’는 알타이-투바 땅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p.72)이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인-아시아인이 방문할지 알 수 없으나, 우리 삶은 최근 몇백 년 사이 우리가 살아온 대로 편안함과 쾌적함을 추구하고, 낯선 곳에서 잠시 알타이 유목민들의 삶을 경험하려고 한다면 ‘이국’이 아닌 ‘이계(界)’처럼 느껴지는 알타이의 모습도,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도 어떻게 달라질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목민들의 삶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삶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행‘객’으로서 관찰한 것을 풀어놓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가 그곳, 그 시간에 있었던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의 일부는 아직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그 땅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으로 하여금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지도 않았다. 더 알게 된 것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 시간을 나는 내 침대 속에서의 며칠 동안 듣고, 그려보았다. 책의 표지 뒷장에 ‘여행기를 읽고서 여행에 욕망에 생기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라는 노승영 번역가의 말이 있다. 내가 책을 빌려준 이를 다시 만났을 때, 책을 반쯤 읽었을 때 했던 얘기가 ‘몽골에 가 보고 싶기도, 가 보고 싶지 않기도 해요’라는 것이었는데, 비슷한 감상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몽골에 간다면 알타이-투바에 가 보고 싶을 것이고, 그때 ‘지프와 플라스틱 야외테이블’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여행이 가능할까 하는 것도 미지수이다. 작가와 같이 갈잔-치낙의 알타이-투바 여행에 소수의 동행자가 되는 것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과, 그런 여행을 내가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닥치면 하게 되겠지만 지프를 타고 유르테 옆에 플라스틱 야외테이블을 펼치는 식으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카자흐’에 대한 언급도 반가웠다. 작가가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카자흐’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가 아닌 ‘카자흐’족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가 방문한 알타이-투바처럼 알타이-카자흐가 되려나 싶지만 서북부 알타이 주민의 90%는 카자흐족이라고 하니 그런 말을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책 속의 카자흐족은 내가 방문했던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의 모습과 닮기도, 닮지 않기도 해서 친숙하고 반가우면서도 낯설었다. 알마티의 유르테(카작어로 그걸 지칭하는 다른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에 펼쳐진 상점에서 맘에 들었던 수공예 소품을 사지 못했던 게 내내 아쉬워서(지금은 그게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결국 나중에 양털로 만든 작은 유르테 모양 소품을 사 왔고 그건 아직도 갖고 있다. 부모님 집에 두고 온 작은 서랍장 위에 놓여 있고, 그 작은 서랍엔 버리지 못한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다. 


어제였는지 며칠 전이었는지 길을 걸으며 생각하다가 이사할 집의 완벽한 주방 싱크대를 위해 여러 날 고민하고 밤을 새우며 도면을 완성하고, 외국에 머물며 한국의 이사할 집으로 직접 제품을 배송하기도 하며 애를 쓰는 사람을 보고, 게다가 그 사람은 의상 디자이너이기도 하고 자신의 사업을 열심히 꾸려가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왜 나는 저 정도의 에너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문득 내게 그렇게 멋지고 완벽한 싱크대-가 있는 집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물론 나도 깨끗하고 쾌적한 집에 살고 싶은데, 그게 꼭 크고 넓거나 멋진 브랜드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누군가 관리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이걸 잘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타이-투바 인들의 삶을 경험하고,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영혼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멀리서 본 것으로 조금 기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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