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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derless Sep 21. 2024

다정한 국어 선생님

요가베르데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마치고 소농로드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던 중 국어 선생님과 우연찮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 하려던 찰나에 자신이 지어놓은 별채에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긴 한데 서울에서는 아마 정중히 거절했을 거다. 서울에서 길게 지내다 보면 경계심이 높아진 상태라 쉽게 관계를 맺지 않는 습관이 생긴다. 여러 번 제주를 오긴 했어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집에 함께 가자는 분은 없었다. 오후 6시가 넘어 해는 저물어가고 죄송하지만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니 고민이 됐다. 맨 몸으로 와서 차도 없고 제주는 아시다시피 밤이 되면 어딜 갈 수가 없다. 오름과 수풀 사이로 이어진 도로는 등 하나 없는 곳이고 별과 달이 등대인 곳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망치기도 어렵고 말이다. 택시 기사님께서 해주신 말 중에 올레길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길래 이걸 어찌해야 되나 싶었다.


잠시 거절 할까 아님 믿고 가야 되나 싶었다. 우스개 소리로 9시 뉴스에 어느 제주 별채의 살인 사건 주인공이 되면 어쩌나 했다. 이건 좀 너무 간 것 같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한 5-10분 정도 고민을 하다 진솔하게 얘기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쁘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별채에 가보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아 가면서도 반신반의했지만. 선생님, 죄송합니다. 너무 솔직한 글입니다.



한 10분이나 됐을까. 잘 지어진 별채 앞에 도착했다. 돌담에는 '딜쿠샤'라는 별채명이 보였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초록 잔디 위에 두 동으로 나뉜 흰색 외벽의 집이 보였고 창 너머로 갈색 푸들과 강아지 한 마리 짖으며 반겨주는 것 같았다. 나를 반겨준 건지 아님 무서워서 짖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꽃밭에 물을 주고 계시는 남편 분이 계셨고 선생님께서는 '저 친구 데려왔어요~ 친구랑 별채에서 대화 좀 나눌게요~' 하시며 맨 오른쪽에 있는 별채로 인도해 주셨다.


하얀 회벽의 별채 외부
불멍 하는 화로가 있는 아담한 별채

손님들을 초대하는 방으로 쓰신다는 별채에 들어가니 짙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단아한 방과 포르투갈 도시패턴을 떠올리게 하는 욕실이 있다. 방 내부를 둘러보며 '집을 아름답게 꾸미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눴을까. 모든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님께서 제주에 내려오신 이유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지 소소한 일상을 들려주셨다. 이 집을 어떻게 꾸몄고 이곳에서 독서 모임도 하시는 것까지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지금 하는 일과 무엇이 고민인지 말씀을 드렸는데 서울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내 고민거리만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짙은 갈색 나무 인테리어
성당 느낌의 아치형 방 입구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 기억에 남는 내용은 서울에서는 돈이나 욕망 때문에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어 힘들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서 편하다는 것이다. 아침 7시에 요가를 가시고 제주 지사로 와서 일을 하시면서 가끔씩 독서 모임을 하시는 소박한 삶을 유지하고 계셨다. '선생님, 저를 오늘 처음 보시는데 어떻게 믿고 데려오셨나요. 선생님께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따로 있으신가요?' 여쭤보니 '대화할 때 허세가 없는 사람이요. 허세가 있는 사람들은 대화할 때 거북함이 생기고 잘 통하질 않아요' 그러시더니 '어떤 사람은 집 하나를 볼 때도 이 가구가 어느 브랜드인지 얼마인지 출처를 따지시는 분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잘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죠.' 어떤 말씀이신지 이해가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사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셨을 텐데 집에 초대해 주신 부분도 신기했지만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제주에서 만큼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서울로 돌아가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만. 제주에 계시는 사장님들과 거주자분들은 여행객과 하는 대화에 큰 거부감이 없어 보일 때가 더러 있었다. 처음엔 인적 드문 섬이다 보니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워서 그럴 수도 있고, 2-3일 안에 떠날 사람이니 무슨 얘기를 해도 언젠가 다 잊힐 것이라 편하게 얘기하는 건가 하는 싶었다.


https://artsandculture.google.com/project/the-arts

푸른색 패턴의 욕실

모두들 제주가 대나무 숲이 되어 서울에서는 차마 얘기할 수 없는 속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풀고 가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한편으론 나도 그런 기분이었다. 서울에서의 삶이 지쳐서 쉬러 온 사람들도 있고 제주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분들도 있었다. 자연에서 치유하고 삶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점을 알고 싶어 떠나온 여행객도 있었고 20대 어린 친구들은 졸업 후 진로와 사랑에 대한 고민을 했다. 어떤 친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할 수 있는지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대견하지 않은가.


모두들 자기만의 고민을 한 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었고 나 역시 그랬기에 제주에서 조금은 무게를 내려놓고 사람들과 차분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함께 이야기 나눴던 선생님께서도 이 글을 모두 읽으셨을 텐데 다소 솔직한 글이라 죄송하고 별채 사진을 브런치에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릴 뿐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도 단정한 별채 모습과 선생님의 담백한 삶의 모습을 보며 힐링하실 수 있으실 거라 여긴다.  


예쁘게 다듬어진 잔디와 아기자기한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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