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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Blues Feb 10. 2019

10. 저녁이 있는 삶 or 저녁이 없는 삶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10화

가끔 생각한다.

요즘 나의 삶은 저녁이 있는 삶인가, 저녁이 없는 삶인가.      


수년간 영업부서에 근무했던 탓에 회사를 다닐 때에는 평균보다 저녁 자리가 많았고 특히 휴직 직전 한 달은 이래저래 만날 사람들이 많아 거의 매일 저녁이 있었다. 그러다 육아휴직이 시작되자마자 아이와 단 둘이 살게 되어 (‘아내 이사의 시작’ 참조) 저녁은 집에서 꼼짝마라 신세가 되며 저녁은 0이 되었다.


2012년에 탄생해 큰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 ‘저녁이 있는 삶’에 비추어보자면 아내의 이사로 나는 비로소 저녁이 있는 삶을 얻게 된 것이다. 매일 내가 준비한 저녁을 딸아이와 같이 먹고, 퇴근하는 배우자도 없어 자기 전까지 노상 집에서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요즘 나의 삶이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혼자 아주 그냥 북유럽이고 스칸다나비아다.(화난 거 아님..)




‘저녁 자리’가 아닌 ‘저녁 차리기’가 매일 이어지는 풀타임 양육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행복이면서도 고민거리이요 노동이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아이가 맛있다며 조물조물 먹을 때에는 그 행복이 어느 행복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어디 매일 저녁이 그러한가. 가사 경력이 오래된 주부들도 저녁 차리기를 가장 고된 일로 꼽는 것을 듣고는 내가 게을러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며 위안하기도 했다.      


우선 세상 깐깐하신 8세 딸아이 마음에 들게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음먹고 저 좋아할 만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요리를 준비했다가 마음의 상처를 몇 번 받고 나서는 휴직 초기의 의욕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저 좋아하는 음식만 차려주자니 누가 보면 친아빠 아니라고 할 수준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다. 이래저래 골치가 아픈 게 요즘 나의 저녁이다.      


휴직과 함께 저녁 자리를 못하는 김에 몸에 안 받는 술도 끊어버리자는 각오가 저녁 맥주 반주 습관으로 처참히 무너진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 아이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돈가스를 먹고 왔는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서(!) 엄청 잘 먹었단다. 원래 입도 짧고 돈가스는 아주 싫어하던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라서 놀랍고 반가웠다. 드디어 나도 좋고 너도 좋은 메뉴가 하나 생겼구나! 그 친구 엄마에게 연락해 어디서 샀는지 소스는 무언지 알아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며칠이 지난 뒤, 또 그 돈가스가 생각날 법 한 날에 장을 봐서는 기름에 정성껏 튀겨가며 저녁을 준비했었다. (들뜬 마음에 튀김용 팬까지 하나 새로 샀더랬다.)     


하지만 아이는 식탁에 앉자마자 ‘아빠, 나 돈가스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라는 타박을 한 후..(이후는 너무 잔인해서 생략) 이게 네가 그 집에서 먹었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던 돈가스와 같은 돈가스라는 나의 하소연은 별 효과가 없었다. 정상참작은 되었으나 실형은 면할 수가 없었다. 그날은 좋았지만 지금은 돈가스가 싫다는데 어쩔 소냐. 이런 홍상수적인 시추에이션이 한두 번도 아닌데 하면서도 끝내 한 입도 안 먹는 그 고집에는 멘탈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맨 정신으로는 당장의 허망함도, 잠들기 전까지 쏟아질 아이의 무수한 잔펀치에도 견딜 자신이 없어 맥주 한 캔을 딴 것이 시작이었다. 이른 시간의 맥주 한 캔은 정말 효과적으로 나의 전두엽을 마비시켜주며 나를 ‘분노조절잘해’ 아빠로 만들어주었고 그날 밤 나는 무탈하고 평화롭게 (아빠 무서워 소리 안 듣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이와 보내는 저녁 시간은 쉽지 않다. 그 시간, 부모 역할의 대부분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이가 욕망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라면은 못 먹게 하고(저녁 뭐 먹고 싶니 하면 아이는 매일매일 “라면!”이라고 대답한다) 보고 싶은 TV는 못 보게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숙제는 하게 해야 한다. 더 놀고 싶은 친구와는 그만 놀게 해야 하고(9시까지 놀았으면 이제 좀..) 하기 싫은 양치질은 하게 해야 하는 게 육아 저녁의 현실이다.      


나의 경우 맘먹고 목소리 한번 높이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이 시간이 더욱 쉽지 않다. 보통의 주부들이 남편의 빠른 퇴근을 기다리는 시점이 바로 이 시점임을 몸소 느낀다. 보통 저녁 식사 시간을 즈음하여 멘탈이 한번 털리기 일수이고 또 다른 보호자, 성인, 어른의 등장이 간절해진다. 그런데 혹시나 했던 기대가 역시나 가 되면..(이후는 무서워서 생략) 나의 경우, 배우자의 조기 귀가이라는 기대 자체가 불가능한 형편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무서운 건 희망고문이지. 땡큐 마이 와이프)     


이렇게 시작된 나의 저녁 맥주 한 캔 습관은 생각보다 일찍 종료되었다. 확실히 맥주 한 캔을 한 후의 나는 아이에게 더 너그럽고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고작 맥주 한잔이라도 술기운 때문에 아이에게 더 거친 언행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 순간부터 맥주를 즐기는 시간은 아이가 잠든 이후로 다시 원복 되었다.      




그렇게 저녁이 너무 있는 삶에 울고 웃던 중 어느덧 그 무섭다던 방학이 찾아왔다.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를 다 차려 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과업이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으니 혼자 장을 보고 요리를 할 시간이 잘 나지 않았다. 아내 역시 방학을 맞았지만 입학, 성적 등과 관련한 업무들이 많아 좀처럼 서울로 올라오지 못했다.      


나도 삼시세끼에 지치고 아이도 심심함에 지칠 무렵,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아빠와 딸 단 둘의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아빠와 딸 단둘이 3박 4일 여행기 com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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