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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Blues Jan 24. 2019

9. 최수종 안되기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9화

의도치 않게 동네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날벼락같은 상황에서 나름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누군가의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억울하기는 하나,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다 이해가 간다(형제들이여 미안하오). 사실 살림이나 육아나 특별히 잘하고 있는 것도 없는데 나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 도드라지는 것이리라.  


혼자 애를 키우고 있는 나의 상황을 동네 사람들이 많이 알까 싶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동네 분위기도 그렇고 우리 부부의 스타일도 그래서 원래 이웃(아이 친구네)들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다. 게다가 작년 초 아이 초등 입학과 함께 전업맘이 된 아내는 그 짧은 사이에 엄마들 사이에서 제법 '인싸'가 되어 있었다.


그런 아내 덕에 나는 아내가 떠난 뒤에도 동네 엄마들과 인사도 하고 카톡도 하면서 육아월드로 연착륙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무지랭이 남편 좀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으리라. 그래서인지 아이와 동네를 돌아다니면 모르는 아줌마가 인사를 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나도 아주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몇 걸음 지나가면 아이에게 조용히 ‘누구 엄마야?’하고 물어본다.


감사한 것은 이런 친절뿐만이 아니다. 아빠만 있는 집에 딸아이를 놀러 보내는 게 쉽지 않아져 버린 험한 세상에도 주 5일, 밤 9시까지 편하게 놀다 가는 단짝 친구들이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와 아이의 사는 모습은 여러 눈에 노출되어 있다.


놀러 온 친구에게 간식이라도 좀 해서 먹이면 다음날 칭찬이 훅 들어온다. 칭찬만 해주면 좋으련만 말미에 ‘우리 남편은..’으로 시작하는 한탄성 멘트가 첨부된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 내가 동네 가정의 평화를 저해하고 있구나. 최수종이 되긴 싫은데.. 자신 때문에 악당이 더 설치는 것을 자각하는 고담씨티의 베트맨의 심정..과는 전후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기분이 착잡해진다. 이러려고 내가 악당을.. 아니 간식을 만든 것이 아닌데..

평화를 해치는 나쁜 팬케익


학원 앞에서 만난 아이 친구 엄마가 삼시세끼 밥은 어떻게 하시냐고 묻는다. "제가 해서 먹지요." 놀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또 ‘에휴 우리 남편은..’이 이어져 나올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다행히 말을 삼키신다. 나도 준비하고 있던 평화 수호용 멘트 ‘전 이제 돈 안 벌잖아요’을 스윽 거둔다.


누구나 한 번씩은 들어봤을, 행동 개선 효과는 1도 없고 대상에 대한 짜증과 분노만 유발하는 그 비교들. 누구 아빠는, 누구 남편은 어쩐다는데.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주인공으로 등판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치 변절한 운동가가 된 마냥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날 우리 집 단골손님인 단짝 친구와 그 아버지를 길에서 마주쳤다. 초면이었는데 처음 보는 그 아저씨가 나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니가 그놈이냐’ 하는 쎄한 느낌. 좀 친해져 볼까 하는 생각은 순삭되어 버리고 괜히 저자세가 되어 어색한 고갯짓만 연신 해대며 지나갔다.


최수종 안되기. 또 막상 생각하면 방법이 없다. 아이를 데리러 가고 오고,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이 모든 게 아이를 위한 일인데 일부러 안 하거나 못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음만 답답할 뿐.


그래서 글로나 외쳐본다. 난 이 동네의 최수종이 되긴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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