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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Blues Jan 24. 2019

8. 피아노 옆 태권도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8화

#1

미술관 옆 동물원을 만든 이정향 감독이 우리 아파트 상가에 온다면 그녀의 눈엔 피아노 옆 태권도가 보일 것이다. 이미 아이들 세대에는 피아노는 여자, 태권도는 남자 식의 구분이 전혀 없지만 나를 비롯한 어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 피아노는 미술관, 태권도는 동물원으로 연결되는 무언가가 남아있다.


실제로 아이의 태권도 수업을 구경하면서 봐도 남녀의 성비는 50대 50에 근접한다. 피아노 학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유독 어른들의 영역, 즉 선생님들의 성비에만 그 시절 그 흔적이 남아있다. 어김없이 태권도 학원은 모두 남자 사범님, 피아노 학원은 모두 여자 선생님이다.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여자 태권도 사범님과 남자 피아노 선생님이 흔하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

육아와 살림의 세계에 아크로폴리스가 있다면 그곳은 아파트 상가일 것이다. 육아휴직 전 가끔 마트 갈 때나 들렀던 그곳은 알고 봤더니 작은 세계였고 도시였다.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상가를 접했던 시간은 밤이거나 주말이었고 상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평일 오전에 가본 홍대였던 셈이다.


아이의 하교(하원)이라는 매일의 대사건을 중심으로, 데리러 가고 데리러 오고 기다리고 정보를 나누고 장을 보고 먹이고 가르치고 치료하고 머리하고.. 가정이 굴러가기 위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

피아노와 태권도.  이웃한 그 모습이 미술관 옆 동물원을 연상시킨다


그곳 2층에 피아노와 태권도가 있다. 이웃한 그 모습이 항상 미술관 옆 동물원을 연상시킨다. 우리 딸아이도 피아노, 태권도를 둘 다 다니기에 나도 매일 출근하다시피 그곳에 간다. 특히 태권도 학원 앞 복도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보호자들로 항상 북적하다.


그런 이유로 사회물이 덜 빠졌던 육아휴직 초반에는 그 공간이 제법 신경 쓰였다. 십중팔구 내 또래 남자는 나뿐이었고 다들 그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나만 혼자인 느낌이었다. 왠지 청일점인 나를 힐끗힐끗 보는 것 같고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음을 깨닫고(!) 편하게 핸드폰이나 보고 있다. 오늘 저녁은 뭘 할까 생각하다 간혹 젊은 남자(할아버지가 아닌)가 나타나면 스윽 스캐닝을 해본다.


'영혼 없는 표정에 약간의 초조함..
연차 내고 마누라 심부름 왔군.'


그러다 생각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나도 예전에 저랬지. 땜빵.. 아내의 오더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 같은 신세..
훗~ 나는 이제 아이의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하고 관리하는 주체적인 풀타임 육아 아빠라굿!'


이상한 우월감의 등장에 혼자 당황한다.


피아노 옆 태권도에서 아이를 기다리며 혼자 생각한다.
육아란 것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드는 것인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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