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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Blues Mar 05. 2019

12. 아빠와 딸 여행기_1일차  #2 나비와 멜론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12화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한 몇 가지 다짐이 있다. 그중 첫 번째가 아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해 주자는 것이다. 어지간하면 저 하고 싶은데로, 엄마와 같이 왔다면 불가능할 각종 방종(?)을 과감히 허용해보자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많은 엄마들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ㅋ)


그런데 괌에 착륙해 리조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애를 울려버렸다.

문제는 그놈에 옷.     


여름옷을 입는다는 생각에 잔뜩 들떴던 아이는 고민고민 끝에 괌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다닐 반팔, 반바지를 겨울옷 속에 입고 왔더랬다. 얼른 이 번데기같은 겨울옷을 탈피하고 예쁜 여름 나비로 변신할 생각에 입국 수속 대기줄 내내 애가 타서 주리를 틀었다.      


드디어 아빠가 말한 적절한 탈피 장소인 ‘수화물 찾는 곳’에 도착. 구석진 곳에서 헐래 벌떡 겨울옷을 벗은 아이. 그런데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이게 무슨 반전인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옷이 안 예쁘단다.

와우..     


그렇게 번데기를 벗은 나비는 자신의 날개 모양에 대실망을 하고 날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붙어 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그 날개 지가 골라놓고는.. 몇 차례의 설득과 달래기를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래..”     


옷을 안 갈아입으면 안 나갈 기세였다. 저 문 밖에는 픽업 가이드와 동승자 일행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딘 경상도 출신 아빠는 당최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혈압도 오를 데로 올라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얼굴도 이미 무서운 표정이 되었겠지. 너 지금 여기 패션쇼하러 왔냐, 숙소까지 금방이니 거기서 갈아입자, 옷 꺼내려면 짐 다시 다 풀어야 돼,  우리가 빨리 나가야 차가 출발할 수 있어..    

 

무서움 모드에 쓴소리 일갈에도 아이는 단호했다.      

“그래도 꼭 갈아입어야겠어?”

아이는 울면서 대답한다

“응.. 갈아입고 싶어 꼭..”     


내가 졌다 졌어. 그래 그 정도면 내가 인정해줄게. 아이의 결연함이 결국 나의 기를 꺾었다.  낯선 장소, 단 한 명의 아는 사람인 아빠가 갑자기 무서워져 버린 최악의 환경에서도 아이는 무서워서 눈물이 나올지언정 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는 생각이 들자 존경심마저 살짝 들었다.


일단 공항이 무너져라 큰 한숨을 한번 쉰 다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아빠가 알았어. 가방 열어 줄 테니 예쁜 옷 골라봐.      

다 헤집혀서 처음부터 다시 싸야 하는 가방을 황급히 정리하며 거대한 마음수련의 일정이 시작됨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날개를 바꾸고 한껏 팔랑데는 나비를 데리고 리조트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꽤 걸어서야 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 가까운 룸들은 애 둘씩 데리고 와서 치열한 휴가를 보내게 될 부모들에게 양보하자.      

방에 도착해서 다시 하이파이브! 침대도 있고 해변도 보이고,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행복했다. 곧 아이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 새벽부터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피곤해? 나가기 싫어? 그래, 쉬자. 쿨하게 오늘은 제끼자.      


아이와 단둘의 여행의 좋은 점은 의사결정이 쉽다는 것이다. 어른이 한 명 빠지면 의사결정이 한결 빠르다. (잘못된 의사결정이 될 수 있을지언정)     


한껏 밍기적거리다 저녁을 먹으러 리조트에서 가장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뷔페식당으로 갔다. 놀랍게도 아이는 3년 전 그곳에 왔던 것을 기억했다. 주스를 쏟았는데 아빠가 혼을 냈단다. 다시 잠시 반성.     

 

워낙 천성이 독립적인 아이라 뭐든 스스로 하려고 한다. 그런 아이는 어릴 때에 부모가 힘들다. 잘 해낼 리 만무하니 결국 손이 두세 배로 가고, 다칠까 봐 조마조마, 잘 안될 경우 짜증 부림도 다반사.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훨씬 편해지긴 한다. 나의 육아철학 중 중요한 부분이 일찍부터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키우자는 것인데, 이 부분은 (드물게도) 나의 철학과 아이의 천성이 잘 맞는 부분이라 육아의 쾌가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식당에서도 그런 쾌가 찾아왔다. 제법 큰 대형 뷔페식당에서도 혼자서 요리조리 음식을 잘 챙겨담으며 여러 번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흰밥에 쿠키 한번, 그다음부터는 멜론만 계속 담아와 먹는다.  뷔페니까 아빠도 아빠 먹고 싶은 거 먹고, 나도 나 먹고 싶은 거 먹는단다. 몇 번의 퇴짜를 맞고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마음수련에 들어간다.     

 

그래도 마지막에 멜론 한 접시를 아빠도 먹어보라고 담아왔을 때에는 감동을 좀 받았다. 휴직하고 6개월을 키웠더니 이제 아빠 생각도 좀 해주는구나. 아이에게 존재감이 없었던 나인데.. 격세지감을 느꼈다. 멜론 한 접시. 아주 오래 기억될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니 이미 어두워졌다. 해가 진 리조트는 더 아름다워졌다. 아이와 산책을 하고 싶었다. 몇 걸음 못 가서 아이가 연신 춥다고 한다. 아, 피곤하다. 맥주 한잔의 힘으로 아이에게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줬다. 너 짧은 옷이 너무 좋지? 그럼 추운 건 너의 운명, 숙명 같은 거야. 익숙해져야 할 거야. 긴 옷 입을 거 아니면 좀 참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몇 걸음은 군소리 안 하고 따라왔지만 곧 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이런 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아이도 나만큼이나 피곤하고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졸린 아이들은 마치 시베리아의 호랑이 같다.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을 절대 내보이지 않는다. 1분 뒤에 쓰러질지언정.


“너 나중에 아빠랑 둘이 산 거 기억나겠어?”

 센티해져서 아이에게 묻는다.      

“아빠가 무서웠다는 건 기억날 거 같아. 헤헤”

아름다운 괌의 밤이 속 뒤집어질 소리도 감성적으로 변환시켜준다. 손으로는 내 눈과 입술을 마구 찢으며 입으로는 저런 소리를 한다. 무서운데 이러냐 훗.


아이는 호랑이 쓰러지듯 잠들었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다짐 – 애 잘 때 자자 –를 실천하고자 나도 일찍 누웠다. 무사한 도착에 흐뭇했다. 삼시세끼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즐거워졌다. 내일 물놀이를 하며 기뻐할 아이를 생각을 하니 더 즐거워졌다.      


정작 2일차의 마음수련은 물놀이에서 시작되었다. 첫날의 잔챙이급 마음수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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