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기록이 낫다.
- 이동진 -
매년 이맘 때면 다음 해에 쓸 다이어리를 장만한다. 내년 일정 관리, 일기, 소소한 일지 등 용도별로 구분해서 필수적으로 쓸 것만 9개가 됐다. 매일 쓰는 것도 있고 독서 일지나 깊은 감정을 쏟아내는 용도를 쓰는 일기장처럼 그때그때 사용하는 것도 있다.
9개는 너무 많지 않나 싶어 줄여보려고 해도 줄일 게 없다. 이래놓고 연말에 끝까지 살아남는 다이어리는 9개가 될 수도 있고, 1개가 될 수도 있다.
연말까지 꾸준히 잘 쓰게 되는 건 늘 별생각 없이 쓰는 것들이다. 올해는 모닝페이지로 사용 중인 몰스킨 포켓 데일리가 그러하고, 작년엔 늘 가지고 다니면서 끄적인 놀티 골드가 그러하다. 각 잡고 용도 정해둔 건 나중에 보면 낙서장 비슷하게 되어 있고, 내킬 때 쓰려고 의미 부여해두지 않은 건 늘 가지고 다니게 되고 일 년의 기록이 담긴다.
사실은 단 한 권만 쓰고 싶다. 일정이고 일기고 단 한 권에다 다 모아서 적고 싶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 예쁜 다이어리가 많다.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건 구입시기일 뿐이고 눈에 들어온 다이어리는 사서 써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걸 알기에 올해도 하나 둘 수집하다 보니 단 한 권만 쓰자던 다짐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 그냥 종이잖아. 예쁜 노트잖아. 쓰다가 맘에 안 들면 하차하고, 꾸준히 잘 써지는 건 연말까지 가지고 가면 된다며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록에 관한 집착? 광기? 는 기록이 주는 마력을 알기 때문이다. 지나간 순간은 흐르는 세월을 따라 흐려지고 사라진다. 그때 내가 했던 말, 내 주변의 풍경, 함께한 사람, 그 순간 들렸던 음악소리, 그 순간의 하늘, 바람이 불 때 흩날리던 머리카락, 읽던 책 구절, 맛있는 음식, 잊을 수 없는 말, 잊고 싶지 않은 말, 그 순간 내가 했던 생각, 내가 느낀 것들…
2005년에 쓴 일기장이 있다. 그 일기장을 2006년에도 읽었고, 2010년에도 읽었다. 그리고 한참 책장 속에 꽂아두었다가 얼마 전에 다시 꺼내 읽었다. 20년 전의 내가 쓴 일기 속에 기록된 일들, 내 감정들이 대부분 지금의 내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이랬다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구나.
글씨체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과거의 내가 남긴 그 순간의 흔적들을 통해 지금은 잊힌 과거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일기장 속에 남겨진 흔적 외의 과거는 순서가 뒤죽박죽이거나 흐려진 과거로 더듬어도 찾을 수 없다.
마치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 같았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해도 되겠다. 미래의 넌 지금을 전부 다 잊어버릴 테니 지금 이 순간의 조각을 너에게 선물할게… 하는 것 같았다.
2005-2006년에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여서 내 기억으론 4-5권의 일기를 썼었는데 그 일기장은 2008년 무렵에 집청소를 하면서 전부 다 갖다 버렸다. 그 일을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한다. 힘든 시기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버텼는지 이제는 생각도 나지 않는데. 가끔 마음이 힘들 때 과거의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넌 어떻게 버텼는지. 대답을 찾을 길이 없다. 버리지 말걸. 너무 아깝다.
그 후의 기록은 내게 지금 이 순간을 종이 위에 새겨서 미래의 나에게 선물한다는 느낌으로 한다. 평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면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말, 그 순간의 풍경, 그 순간 내가 한 생각을 다 기록한다. 지금을 사진 찍듯이. 사진을 종이 위에 묘사하듯이.
짧은 단상을 기록할 때도 날짜와 시간을 꼭 기록한다. 때로는 기록하는 장소도 적는다. 편지라서 그렇다. 그렇게 수집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다이어리 개수도 늘어나기 시작해서 지금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1년에 9개 + @
요즘은 유튜브도 내년 다이어리를 장만 중인 기록 광인들의 콘텐츠를 즐겨본다. 나도 같은 다이어리를 수집한 경우면 반가운 마음이 들고, 처음 보는 다이어리면 그 브랜드를 찾아보고 마음에 들면 아카이빙 해둔다.
요즘은 기록을 하면 바로 다시 읽어보지는 않는 편이다. 기록하고 바로 다시 읽던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쓰고 쌓아둔다. 그리고 한 3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요즘 다시 펼쳐보는 다이어리는 2018년도 즈음에 쓴 것들인데 다시 보면 너무 재미있다. 1년에 9권 장만해서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잊힌 기억이 다시 생생히 살아나는 기적. 종이 위에 남겨진 순간의 흔적을 오롯이 만끽하며 과거를 마주하고, 때로는 변해버린, 또는 성장한 지금의 나를 마주한다. 나는 늘 똑같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로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걸어왔고 변했고 성장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지금하고 있는 생각을 그때도 하고 있는 것.
그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
나를 ‘나’라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많은 것들 중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남겨준 것들을 생생하게 음미하면서 나는 과거의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렇게 순간을 남겨줘서 너무 고맙다고.
올해는 연초에 열심히 쓰다가 4월부터는 기록이 끊겼다. 그때부터 저녁엔 엄마 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엄마 간병을 하면서 일단 몸이 너무 피곤했고 기록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기록을 남긴 날은 잊고 싶지 않은 엄마와의 순간을 남겼다. 엄마가 내게 해주신 말들, 엄마와 지낸 밤을 기록했다. 더 남기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 피곤을 이기고 기록을 남겨준 나에게 고맙다. 사실 그즈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순간순간의 단상을 마구 써서 남겨놓은 덕분에 그때의 우리를 추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예전엔 데일리 다이어리의 빈 종이를 보면 스트레스가 팍 올라왔다. 종이가 아깝고, 연초에 했던 다짐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질책하게 됐다. 그리고 한 번 기록에 공백이 생기면 열정이 팍 사그라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한 번 기록이 비면 그러다 죽 비게 되면서 그 다이어리를 쓰지 않게 되는 패턴이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후로도 두 달이 지나도록 기록은 고사하고 종이 한 장 펼쳐볼 마음조차 들지 않다가 어느 날 밤, 데일리 다이어리를 펼쳐서 후루룩 넘겨보았는데 연초에 열심히 쓰던 페이지를 지나 하얗고 광활한 빈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기록에 남지 않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이 빈 페이지는 엄마와 함께 한 시간에 집중한 나의 또 다른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세계에서 사느라 고군분투하느라 기록하지 못한 것이 기록이라는 생각. 이 때는 엄마와 같이 있었구나…. 빈 페이지가 좀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 또한 내 삶이고 내 기록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치의 빈 페이지를 잔뜩 넘기고 오늘의 페이지에 이르러서 다시 펜을 꺼내어 글을 썼다.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중간에 비어있는 페이지는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현실세계에서 열심히 산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 중간중간 피곤을 이기고 기록을 남겨줘서 고마워. 이제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쓸게.
최대한 선명하게 써볼게.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
사진 : 사진: Unsplash의Medina Spahi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