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장만한 아주 많은 다이어리들을 2월까지 별 차질 없이 쓰고 있었는데 3월 초에 집 대청소를 하고, 대청소가 끝나자마자 식중독에 걸려서 한 삼일 제정신이 아닌 날을 보내고 나니 벌써 3월 중순이다.
정신을 차리고 빈페이지가 넘쳐나는 다이어리들을 마주하니 좀 막막하면서 갑자기 쓰기가 싫어지는 이 놈의 고질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반나절 쓰지는 않고 고통받다 내린 결론은 빈 페이지는 그냥 내버려두고 오늘부터 다시 쓰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빈 페이지는 현실세계에서의 고군분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5년 일기장에는 빈칸을 두기 싫어서 기억을 쥐어짜고 짜내서 다 채워 넣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다시 겨우겨우 기록생활을 이어놓고 보니 읽다 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병렬독서는 잠시 쉬고, 한 권에만 집중하기로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책상 위에 웬 책탑이 높디높게 쌓여있는 것이었다. 한국장편, 외국고전소설, 한국대하소설, 역사책, 미술책, 구독지 등등등. 하. 이것도 정리하자 싶어 진짜 읽을 것만 남겨놓을랬더니 거기 있는 것들 다 진짜 읽는 것들이 아닌가. 이걸 어쩌다 어 전다 하다가 도서관에 신청한 희망도서를 수령하라는 연락을 받고 정말 힘들게 한 권을 다시 책꽂이에 넣었다. 우리 좀 이따 다시 만나자 인사도 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책의 앞페이지를 뒤적이고 메모해 놓은 것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무슨 내용이었는지 떠올려봤다. 맞다 이런 내용이었지. 그리고 다음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다.
삼천포로 빠져도 너무 깊게 빠져서 내가 읽던 대하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는데 외국책을 읽다 보니 한국책을 읽고 싶어 집어든 조정래 <아리랑>에 꽂혀서 지금 3권을 달리고 있다. 언제쯤 돌아갈는지....
놔버린 공부도 해보려고 주섬주섬거리고 있다. 부산도서관에 수강신청해서 듣다가 만 강의들을 다시 이어 들으려고 오랜만에 로그인했더니 강의 중에 하나는 이번 달에 폐강된다고 공지가 떠있었다. 와 책도 사놨는데 폐강이란다. 진작에 할걸 이러면서 어쩌지 하다가 공부계획을 세운다. 계획 세우는 거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다이어리가 이렇게 많다.
주섬주섬 뒤적뒤적 깨작깨작. 요즘 내 모습. 오랜만에 마주하는 모습. 깨작깨작대는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 뭔가 해보고 싶어 졌냐? 하다 만 게 눈에 밟혔냐? 뭘 그렇게 해보고 싶은데?
몰라. 마음 가는 대로.
일단 깨작깨작이나마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던 날들을 생각하면 이런 내 모습은 살겠다는 걸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사는 게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움직이지도 않고 우두커니 멍하니 그런 생각만 하던 때를 생각하면 깨작깨작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살고 있는 건가 싶어서 좀 더 오래 이러고 싶다.
늘 하다가 중간에 때려치우는 버릇이 있지만 뭐든 이렇게 자꾸 만지작만지작거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