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이라이트는 백도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배웠는데, 이제 존재감 없는 봄과 가을, 강렬한 여름과 애매한 겨울로 변해가고 있다. 비슷하게 선선해도 봄과 가을은 각자가 가진 선선함의 빛깔과 온도가 전혀 달라서 너무 사랑하는 계절인데 봄은 미세먼지와 황사와 함께하는 계절이 되었고, 가을은 ‘왔네?’하면 겨울이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분기별로 자기만의 확고한 기간과 색채를 가지던 계절의 균형이 나날이 변해가더라도 여전히 사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음이 기쁘다. 각 계절이 주는 자연의 변화와 정취를 느낄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고 그 계절 속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찾아 누리는 것이 삶의 재미다. 엄마와 내겐 ‘제철 과일 먹기’다. 그 계절에 먹어야 가장 맛있는 야채, 과일들! 그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야채, 과일들!
봄에는 짭짜리 토마토가 맛있다. 처음 짭짜리 토마토를 보고 초록색 비중이 커서 맛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진짜 짭짤한 맛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쪼그마하지만 야무지고 딴딴하게 익어가지고 어떻게 그런 맛이 나는지 신기해하면서 앉은자리에서 4-5개를 먹었다. 대저 짭짜리 토마토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되었는데 우리도 역시나 대저에서 주문해서 먹는다. 어린 시절엔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서 먹기도 했는데 짭짜리 토마토는 생으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그리고 두릅이 맛있다. 봄이면 외사촌 오빠가 두릅을 잔뜩 택배로 보내주신다. 5년 전이었나. 밥상 위에 올라온 두릅을 초장에 찍어서 먹었는데 쌉싸름한 맛이 어찌나 싱그럽고 상쾌하던지. 역시나 두릅도 살짝 데쳐서 생으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엄마는 가끔 전처럼 부쳐주기도 하시는데 초장과 함께 먹는 생두릅은 봄의 필수 야채다. 오빠 감사합니다.
여름은 길가에 파는 참외, 특히 상주 참외가 눈에 먼저 띈다. 트럭에서 파는 참외를 사서 집에서 깎을 때의 손맛이 있다. 진짜 맛있는 참외는 깎을 때부터 느낌이 온다.
자두도 맛있다. 엄마는 ‘저 자두 참 맛있게 생겼네.’ 하시면서 사 오시는데 나는 자두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수박이 맛있다. 수박은 여름에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재작년에 수박 4통 정도를 사 먹어봤는데 너무 맛이 없더라. 당도가 하나도 없고, 생무를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년엔 그래도 좀 괜찮았는데 3통 중에 1통만 맛있고 나머지는 역시나 생무와 수박을 섞은 듯한 맛이 났다.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햇빛을 충분히 받은 달달하고 설탕 잔뜩 묻은 듯한 수박이 만들어지기가 어려운 듯하다.
매실을 담근다. 매실은 농장에서 직거래를 한다. 5월 어느 날이면 농장에서 주문 예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키로 수와 주소를 적어 답장을 보내면 예정된 날 매실 박스가 집으로 배달된다. 그리고 돈을 입금한다. 재작년엔 처음으로 매실주를 담아봤다. 1년 동안 밀봉하고 작년에 열어서 한 잔 마시고 병에 담아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해주셨다. 집에서 담근 매실주여서 매실이 아낌없이 들어가서 향과 맛이 너무 좋더라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소주를 잘 마시지 못하는데 한 잔 가득 퍼지는 매실향과 달콤한 맛에 작년 여름 세 네 잔 정도 매실주를 마셨다. 올해도 매실주를 담아볼 생각이다.
그리고 엄마와 나의 연중 하이라이트. 바로 복숭아다. 특히 백도 복숭아! 백도 복숭아 사랑해!!
참외도 좀 먹었고, 수박도 맛 좀 봤으면 이제 복숭아가 나올 때가 됐는데. 딱딱 복숭아 한 박스 사서 살살 깎아먹고 나면 이제 백도 복숭아를 먹어야 한다. 재작년엔 수박도 맛이 없더니 백도 복숭아는 아예 구경도 하지 못했다. 역시 날씨 때문에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작년엔 백도 복숭아를 먹을 수 있었다. 단골 과일집에서 백도 복숭아를 취급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처음으로 엄마랑 농산물 도매시장에 가보았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장 가득 채워진 엄청난 과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얗고 고운 백도 복숭아는 보기만 해도 행복해졌다. 한 상자 사서 집에 오자마자 엄마랑 하나씩 깎아서 먹었다. 나는 복숭아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비닐장갑을 껴고 만지는데 그 꼴을 보기 싫은 엄마는 늘 엄마가 복숭아 껍질을 깎아주신다. 아주 짧은 기간 반짝 만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금방 멍이 들어버려서 백도 복숭아는 아낌없이 팍팍 먹어야 한다. 또 먹고 싶어도 그때는 이미 시즌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가을에는 단감이 맛있다. 엄마는 단감을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하신다. 엄마랑 가을이면 먹던 단감도 행복의 기억이다.
그리고 밤이 맛있다. 밤은 공주밤이 유명한가 보다. 내게 밤은 엄마가 삶아서 하나하나 잘 까서 큰 가락국수그릇에 잔뜻 쌓아주신 밤이 최고의 밤이다. 엄마의 정성과 사랑인 밤을 한 알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확신이 든다.
겨울엔 딸기가 맛있다. 선명한 빨강빛으로 가득 채워진 탱글탱글한 딸기를 먹었다. 요즘 딸기는 이름이 있다. 설향 딸기가 유명하고 재배한 사람의 이름을 딴 딸기도 유명하다. 브랜드가 된 딸기여서 가격도 비싸다. 큰맘 먹어야 집어들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그래도 한 번은 엄마랑 먹어야지. 우리 집 꼬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먹어야지. 하면서 벌써 몇 통을 사 먹었는지 모르겠다. 딸기에 대해서는 가격이 비싸도 아껴지지가 않는다. 소고기를 구울 때, 딸기를 먹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 뭐 하려고 돈 버냐 이거 먹으려고 돈 벌지.'
그리고 겨울에 딸기와 함께 우리 집 과일 쌍두마차는 바로 만금류이다.
겨울이 지나감에 따른 코스가 있다. 황금향-레드향-한라봉-천혜향 코스인데 중간중간 귤이 있다. 겨울 초반에 황금향과 레드향을 먹는다. 조금 더 지난겨울엔 한라봉, 그리고 겨울의 끝자락에는 천혜향을 먹는다. 비슷하게 생긴 듯 하지만 모양도 다 다르고, 맛도 다르다. 엄마는 올 겨울 레드향을 즐기셨다. 나는 천혜향을 좋아하는데 올 겨울 엄마랑 사서 먹은 레드향은 과육이 탱글탱글하고, 먹자마자 콧소리가 절로 나와서 천혜향 사 먹는 시기를 놓쳤다. 토스 쇼핑에서 엄마가 주문한 레드향 소과가 어찌나 맛있던지 역시나 잔뜩 쟁여두려고 주문했는데 실수로 중과를 주문했다. 그런데 중과는 어찌나 맛이 없던지. 다시 소과를 주문했는데 아니 농장 사장님! 소과가 다 떨어졌다고 임의로 그 맛없는 중과를 보내셨다. 지금 김치냉장고에 맛없는 레드향 중과만 두 박스 분량이 들어있다. 하.
웬만하면 항의 의견 잘 안 쓰는데 쇼핑몰에 들어가서 사장님한테 항의의견을 올렸다. 사장님이 소과가 다 나가서 더 비싸게 팔고 있는 중과를 보내셨다고 하는데. 엄마한테 이야기하니 그냥 먹자고 하신다.
학창 시절, 방에서 뭔가 하고 있으면 엄마가 접시에 예쁘게 잘라서 내어주시던 과일. 예전에 동생이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헤드셋을 끼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킥킥 웃으면서 중간중간 누구와 이야 하면서 또는 채팅을 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러면 엄마가 방에 들어가서 과일 먹을래 살짝 물어보면 늘 안 먹는다고 했다. 엄마 기분 좋게 흔쾌히 먹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 막상 가져다주고 나중에 들여다보면 접시가 싹 비어져있는 걸. 나중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과일 접시를 가져다주셨다.
나는 엄마랑 같이 과일을 먹는 편이다. 엄마랑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란히 앉아서 티브이를 보면서 먹었다. 그러면서 이거 먹고 다음엔 뭐 사 먹을까 계획을 세우는 거다. 먹으면서 다음 먹을 거 생각하는 재미는 엄마랑 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
엄마는 과일을 씻을 때 세척을 무척 강조하신다.
“이것 좀 봐라! 얼마나 농약을 갖다 뿌렸으면 이렇냐.”
“과일 예쁜 거 좀 봐라! 얼마나 농약을 갖다 뿌렸으면 이렇게 예쁘게 자랐겠냐.”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엄마에게 과일은 먹는 것보다 세척이 중요하다.
밀가루, 소금, 베이킹소다, 식초 다양한 종류의 세척제로 과일을 씻었다. 무조건 과일 껍질에서 뽀득뽀득한 느낌이 나야 한다. 뭔가 미끌미끌하면 세척 탈락이다. 내 손에서 엄마 손으로 홱 낚아채져서 뽀득뽀득해질 때까지 씻겨야 먹을 수 있다. 요즘은 야채과일 세척제가 제품으로 잘 나온다. 세척제를 살짝 섞은 물에 과일을 잠시 담갔다가 헹구는데 그 잠시 동안에도 물에 뿌연 무언가가 둥둥 뜨는 걸 보면서 엄마는 또 말씀하신다.
“이것 좀 봐라! 얼마나 농약을 갖다 뿌렸으면 이렇냐.”
그래서 우리가 먹는 과일은 주로 국내 과일이다. 우리나라 안에서 유통되는 과일도 저렇게 농약을 뿌리는데 해외에서 오는 과일에는 얼마나 약을 뿌렸겠냐며 해외 과일은 거의 쳐다도 보지 않으신다. 나는 체리도 너무 좋고, 망고도 좋고, 길쭉하게 생긴 씨 없는 포도도 좋다. 혼자 먹을 생각으로 체리라도 사 가는 날에는 잔소리 폭탄이다.
일단 사서 먹어보고 맛있으면 또 산다. 엄마랑 내가 순도 100% 마음의 일치를 보는 것 중 하나가 이렇게 맛있는 건 만났을 때 많이 쟁여놓는 것이다. 그 계절에 맛있을 때 잔뜩 쟁여놓고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관은 김치냉장고에 해야 한다. 보관만 잘하면 정말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후 쟁이는 스케일이 점점 과감해졌다. 김치냉장고 한가득 들어찬 과일들을 보고 있는 마음이 그 옛날 집안의 풍성한 곳간을 들여다보시던 옛 어르신들의 마음이려나.
하지만 너무 오래 보관하면 맛이 없다. 되도록 빨리 먹어야 한다. 저장의 전제는 싱싱함과 순환의 보장이다. 그래야 다음 계절의 가장 맛있는 과일을 마음껏 먹고 쟁일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제철 과일이 맛있는 건 같이 먹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같이 먹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입에 있는 것도 꺼내서 넣어주고 싶은 사람. 더 이쁘게 생긴 부분을 주고 싶고 맛있는 부분을 주고 싶고 혼자 있을 땐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