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면 죽어야 한다.
!! 스포주의!!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스포일러 포함이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영화 ‘바닐라 스카이’의 주인공은 사고로 얼굴이 망가져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방황하다가 얼굴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을 미래에 깨어나기로 하고 자신의 몸을 얼린다. 동면에 있는 동안 늘 꿈꾸던 삶을 세팅해 놓고 그 속에서 산다. 꿈속에서 꿈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어떤 오류들로 인해 현실인줄 알았던 이 세계가 자기가 세팅한 꿈속의 세계라는 걸 알게 된다.
현실은 자기가 꿈을 꾸기 시작한 때로부터 150년이 지났고,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의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사고로 망가져 있는 얼굴로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만 그는 꿈에서 깨어나기로 한다. 그리고 눈을 뜨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순수한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연인을 내내 그리워하다 마지막에 다시 만나서 나누는 둘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그건 이번 생에서 헤어진 존재들이 하고는 약속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우리 꼭 다시 만나자’와 같은 일은 일어나긴 어려워, 이 생에서 헤어지면 끝이야..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짧은 인생 속 어느 시절에 만난 마음을 나누는 인연은 그래서 소중하다. 여기서 헤어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주인공(너무 잘생긴 리즈 시절 톰 크루즈임)이 꿈에서 깨지 않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세팅해 두었는데 150년 동안의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기로 결심한 그가 두려움에 맞서 그것을 해내던 장면이다.
그 장면은 보이는 대로라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것은 꿈속에서 살던 존재의 죽음이자 진짜 삶 속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태어나려면 죽어야 한다.
평생 단맛만을 알고 산 사람은 그게 ‘단맛’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달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그에겐 그게 그냥 그런 맛일 수 있다. ‘단맛’은 ‘쓴맛’, 또는 덜 ‘단맛’을 알아야 느낄 수 있는 거다.
한동안 인생의 쓴맛이 꾸준히 찾아와서 처음엔 쓰더니 이제는 이게 쓴 건지 원래 이런 건지 무뎌진 듯하다. 가끔씩 찾아오는 인생의 단맛에 소스라친다. 단맛을 달다고 느끼기보다 이 단맛으로 인해 무뎌진 쓴맛을 쓰다고 느끼게 될까 봐, 단맛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힘들어질 텐데…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쓰디쓴 현실을 잊고 싶을 땐 자주 눈을 감고 먼 곳으로 간다. 오래전 가족들과 모두 함께 살던 시절로 가서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워질 순간인 줄도 모르고 그냥 살고 있는 과거의 나를 부러워한다. 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을 수 없는 답을 찾으려고 한다.
과거의 시간 속으로 가있는 동안 현재의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가는데 내게 지금 이 순간은 바닐라 스카이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꿈이더라도 바라는 세계 속으로 갈 수 있다면 실제로는 살지 않아도 되는 현실과 비슷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더라도 꿈속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더라도 진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 꿈에서라도 행복한 게 낫지 않을까? 고통뿐인 현실을 굳이 겪어야 할까?
과거의 나를 보고 있는 동안 현재의 나는 진짜 세상을 살지 못하고 꿈속을 사는 것과 같은 상태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계속해서 지금의 나도 과거가 되어가는데 미래의 나는 과거를 들여다보느라 진짜로 살지 못한 나를 뒤돌아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미래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는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될 텐데 나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처럼 나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꿈을 꾸고 있는 것과 마찬갖지라는 것을 알게 되자 현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눈을 깜빡여야 하고 팔다리를 실제로 움직여야 하고, 실제로 부딪히고 겪어야 하는 진짜 세상. 이미 정해진 필름을 수없이 반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필름 위에 실시간으로 나를 찍어나가는 삶.
영화의 명대사가 있다.
"Every passing minute is another chance to turn it all around."
매 순간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인데, 매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떤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것인지는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내게도 엉망진창인 부분이 있지만 아직 깨어나면 맞이할 수 있는 현실이 있다면 나도 눈을 떠봐야겠다. 눈을 뜨려면 나도 두려운 무엇인가를 깨고 나와야 한다. 나를 꿈속으로 자꾸만 가게 하고, 꿈속에 머물게 하는 그 무엇을 반드시 부수고 나와야 한다. 눈을 떠야 한다.
사진 : 사진: Unsplash의 Joel Hen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