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솔직한 마음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지냈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아빠와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동생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2008년에 8월에, 동생은 2022년 4월에, 엄마는 올해 7월에 떠나셨다.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는 내가 국민학생이던 시절 문을 닫았다. 그땐 내가 여섯 살 무렵이어서 아빠가 사장을 잡으러 다녔다... 그런 말들은 기억난다. 아빠는 이후 평생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셨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걸 가장 노릇이라고 말한다면 아빠는 가장노릇을 하지 못하셨다. 엄마는 아빠가 회사에 다니시던 시절 단 한 번도 월급봉투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엄마가 아빠에 대해 서운했던 점들을 너무 자세하게 나에게 털어놓는 바람에 아빠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는지도... 엄마에 대한 연민이 깊어졌는지도...). 엄마는 귀걸이를 떼어다 시장에다 내다 파시기도 했고, 남의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해서 우리 남매를 먹여 살리셨다. 엄마는 어떤 날엔 다림질을 7시간을 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언젠가 내 옷을 좀 다려달라고 엄마에게 대수롭지 않게 부탁하자 엄마는 미안하지만 다림질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래놓고 결국은 내 옷을 다려놓으셨지만. 그래서 나는 자라는 내내 아빠가 미웠다. 사지멀쩡하면서 왜 저러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엄마가 제발 이혼하고 버렸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내게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발견 당시 4기, 위암덩어리가 식도를 막고 있어서 수술을 해서 음식은 내려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항암은 하지 않으셨다. 진단 당시 의사는 3개월 정도 남았다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아빠는 1년을 더 살고 돌아가셨다. 그 마지막 1년 동안 아빠라는 사람이 가진 마음의 상처가 뭐였는지 알게 되었고, 아빠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은 할머니 대신 아빠를 돌봐주신 고모할머니였고, 아빠의 친형제들이었다(할아버지가 삼혼을 하셔서 아빠는 7남 1녀 중 셋째, 친형제는 네 명이다). 정확한 기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간성혼수로 의식이 없던 아빠가 작은아버지가 면회를 오시자 눈꺼풀을 마구 깜빡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너무 보고 싶던 동생이 왔다 가자마자 아빠는 숨을 거두셨다. 아빠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실 땐 차라리 아빠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었다. 아빠가 진짜 돌아가시고 나서는 평생 미워했던 아빠였는데 그런 아빠여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곁에 조금만 더 계셨다면 지난 시간 동안 꼬였던 오해의 실타래도 풀고 내 마음속 아빠에 대한 사랑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차라리, 힘들 바에는 차라리 일찍 편해지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곁에 계실 때 좀 더 다정하게 대해 드릴걸. 떠나시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리움만 남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 동생은 내 친구 같고 내 아들 같던 내 동생은 엄마 생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오후에 동생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생일에 미역국은 드셨냐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그 전화가 동생 생애의 마지막 전화였다. 유서가 없어서 동생이 왜 죽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좌절, 절망, 우울, 분노, 자책, 무기력, 불안, 공포 중 무엇이었는지 혹은 그 모든 것이었는지도 잘 모른다. 2018년부터 다른 지역에서 혼자 살며 자영업을 하던 동생은 2020년 들이닥친 코로나로 2년 동안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빚을 지고 빚독촉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공과금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는 것을 동생이 죽은 후 동생 집에 가서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동생 사는 집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무심한 나를 혐오하게 됐다. 이렇게 동생 사라지고 나면 매일 같이 생각하고 이제는 매 주마다 가볼 수도 있는 마음인데 그때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길래, 뭘 하면서 살았길래 그렇게 무심했는지 모르겠다. 동생 죽음 이전의 나에 대한 기억, 동생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졌다. 버스 한번 타면 되는 건데 뭐가 그리 멀다고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두었을까. 텅텅 빈 냉장고, 밀린 공과금 고지서로 가득한 서랍장, 빚독촉 문자로 가득한 휴대폰, 라면찌꺼기가 남아있는 냄비와 그릇들로 가득한 설거지통, 엉망진창이 된 옷방, 동생이 죽은 자리에서 저 멀리 넘어져있는 의자. 동생이 죽은 자리에서는 죽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가 느껴졌다. 그날 전화를 끊고 나서 넌 어디로 발길을 향해 걸었을까. 그때 내게는 잘 지낸다고 말할 때 너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 도와달라고 죽고싶다고 혹은 살려달라고 그런 말이 입가에 맴돌고 있었는데 애써 삼키진 않았을까. 동생 휴대폰 인터넷 검색기록에는 몇 달 전부터 '자살'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서 죽을 방법을 찾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살기 싫었을까. 죽고 싶었을까. 그 말은 그때 너의 삶이 네가 살고 싶던 삶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져 있었다는 뜻이었을까. 넌 몇 번이나 떠나려고 결심했다가 단념했을까. 마지막 통화에서 그 힘없던 목소리를 알아챘으면서 왜 난 더 캐묻지 않았을까. 왜 다시 전화해보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두었을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너무 미안해. 너무 몰라서 미안해. 보지 않으려고 알아보지 않으려고 내가 보고싶은 것만 보려고 해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동생이 떠나던 당시 엄마는 위암 4기 진단을 받은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는데 엄마는 항암도 너무 씩씩하게 잘 받고 암 크기도 작아져서 밥도 나보다 더 잘 드시고 체력도 나보다 더 좋으셨다. 내가 기댈 존재는 오로지 엄마뿐이었고, 엄마에겐 나뿐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통곡소리. 엄마는 그 이후부터 서서히 상태가 나빠지셨다.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현실이 맞는지 조차 모르겠는데,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엉망진창인 나무배를 타고 망망대해에 떠있는 느낌인데 어떻게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낼까. 엄마는 남은 자식 하나라도 지켜야 한다셨지만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서서히 내려놓고 계셨던 것 같다.
동생이 살던 지역으로 가자마자 경찰서에 가서 이런저런 조사를 받고, 타살이 아니라 자살로 결론을 짓고 나와서야 장례식장으로 갈 수 있었다. 차가운 영안실에 누워있는 동생을 봐야겠다 싶었다. 내 동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꼭 봐야겠다고 했다. 어제저녁에 분명 내게 전화해서 잘 지낸다고 말했던, 살아있던 내 동생인데 지금 그 아이가 죽었다는데. 방금 경찰서에서 동생을 지칭하던 ‘변사자’라는 단어를 숱하게 듣고 나왔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내 눈으로 봐야겠다 싶었다. 그야말로 차디찬 영안실 냉동고의 한 칸. 그 아래 적혀있는 동생의 이름. 그 안에서 나온 동생. 보라색으로 변한 동생.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앙다물고 식어버린 내 동생. 그 장면을 보고 나와서 장례식을 치르고 동생 유골을 바다에 뿌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시작하고. 매일 같이 동생이 죽던 날, 그 방으로 가는 상상을 했다. 동생이 죽으려고 하고 죽기까지의 장면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내가 가서 말리는 장면. 동생을 살리는 장면. 그렇게 하면 정말 동생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죽으려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넌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런 일을 했어.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네가 살아있을 때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을 이제라도 헤아리고 싶어서.
엄마 몰래, 세상 사람 아무도 몰래, 매일같이 동생이 떠난 방으로 가는 상상 속에서 동생을 살리는 날도 있고 떠난 동생을 뒤늦게 발견하는 날도 있다. 그 방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망가졌다. 내가 망가지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동생은 그렇게 죽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 동생의 이름은 동생이 살아있을 땐 너무 가까운 사이, 너무 당연한 존재여서 평소엔 늘 잊고 살았다. 세상에서 사라진 지금은 너무 사랑하는, 그리운, 보고싶고 사무치는 존재여서 매일매일 읖조리는 이름이 되었다. 너무 소중한 세 글자.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을 세 글자.
동생이 죽은 걸 자살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하자고 하는 지인어른에게 화가 났다. 동생의 죽음에 어떻게 죽었냐고 죽음의 방법을 캐묻는 사람에게 환멸이 났다. 내 동생은 죽고 없는데 그런 사람 하나 없어도 세상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이 세상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지금 이 지옥 속에서 허덕이는데 저 유리창 바깥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났다. 조금만 더 살아볼 생각을 하지 그렇게 죽어버린 동생에게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냐고. 아침에 눈을 뜨는 일도 밥을 먹고 자는 일도 죄스럽고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움직이는 것 내가 너무 혐오스러웠다. 동생이 그렇게 고통을 받았는데 너도 벌 받아야지. 가족인데 그렇게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으면 이제 너도 좀 고통받아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벌을 받는 거라면 살아있을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내가 나를 좀 덜 혐오하지 않을까. 그런 나날을 2년 정도 지냈다. 동생이 죽고 나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만 봐도 숨이 막혀오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군가 목을 매는 장면만 나와도 뒷목부터 뻣뻣하게 마비되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고 숨이 쉬어지지 않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눈앞이 빙빙 돌고 눈앞에 절벽이 있다면 뛰어내릴 것 같은 충동이 들었다.
엄마는 2020년 6월 위암 4기를 진단받으셨고 2025년 7월 11일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지난 5년의 투병기간 동안 얼마나 용감했고 씩씩했고 아름다웠는지는 내가 똑똑히 보았다. 엄마는 수술을 위해 배를 열었다가 복막전이가 발견되어 수술을 하지 못하고 나온 일을 세 번이나 겪으시고도 용기를 잃지 않으셨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 눈물을 닦고 다시 용기를 내서 열심히 치료받고 생활하셨다. 애증의 모녀관계라고 하면 우리도 정말 할 말이 많다. 나는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엄마와 맞지 않는 부분도 너무너무 많아서 엄마와 사는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갈등을 빚었다. 그때는 엄마가 간섭하는 게 너무 끔찍해서 반항하고 대들면서 엄마 마음에 생채기를 많이 냈는데(엄마도 마찬가지) 자식을 안전하게 키우고 싶어서 염려해서 했던 말과 행동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엄마의 사랑 표현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아파서 말 그대로 죽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엄마한테 짜증을 부렸는데 짜증을 부리는 실시간으로 나라는 인간은 참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엄마한테 사과를 하기도 하고 하지 않은 때도 있었는데 엄마는 돌아가시지 한 달 전부터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셨다.
엄마는 올해부터 항암치료를 중단하셨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암덩어리 크기가 작아지고 엄마의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아지던 때도 있었지만 동생의 죽음 이후로 항암제도 몇 번 바꾸면서 부작용으로 힘들어하셨다. 머리가 다 빠지면서 가발을 쓰게 되던 시기에는 엄마가 크게 상심하셨다. 씻고 있는 엄마 등을 밀어드리고 있으면 두피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게 보였다. 엄마는 평생 내 머리카락이 빠져서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걸로 잔소리를 하셨는데 이제 당신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져서 내가 그랬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집 구석구석에 날리고 있는 상황을 며칠 겪고 나서 머리를 다 밀어버리셨다. 가발의 헤어스타일을 고르는 건 예상 밖의 재미였다. 막상 가발을 쓰고 헤어스타일 세팅을 하니 예전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동생이 죽고 나서도 2년 동안 엄마는 넘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삶을 이어가셨지만 엄마 말로는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라고 하셨다. 올해 초부터는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상태가 되셨는데 그런 상태로 항암을 하면 더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다고, 병원 안에만 갇혀서 살다 죽기는 싫다고 하셨다. 집에서 편하게 지내다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날 엄마와의 통화는 엄마 목소리가 녹음된 통화내역 2674개 중에 하나로 보관되어 있는데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면 종종 듣곤 한다. 그때 엄마는 엄마가 통증으로 고통받을까 봐 걱정된다고(아빠가 고통받던 걸 봐서 그렇다) 하면서 우는 나에게 모든 건 엄마가 감당할 몫이니 엄마가 가고 싶은 길을 응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를 온 마음을 다해서 응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매일매일 쇠약해지셨다. 엄마는 엄마 다리로 걸었는데 부축해야 일어설 수 있었고 누워서 뒤척이시다가 나중에는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셨다. 죽을 드시지 못하다가 미음을 드시지 못하다가 박카스만 한 모금씩 드시다가 물만 한 모금씩 드시다가 얼음만 씹어서 뱉어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엄마 간병은 낮에는 엄마가 다니던 절에서 지인분들이 나오셔서 도와주셨고 밤에는 내가 엄마를 돌보는 식으로 이어나갔다. 엄마는 5월부터 틈틈이 유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들을 남기셨다. 연말에 인터넷이랑 티브이 약정이 끝나니까 놓치지 말고 챙겨라, 담가둔 된장, 간장 버리지 말고 먹어라, 텃밭에 심어둔 나무에 비료는 꼭 뿌려야 열매가 맺힌다, 갚을 빚은 없냐 엄마 있을 때 갚아주고 싶다, 엄마 없어도 울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등등. 그리고 중요 문서나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금고를 집에 들이던 날에 엄마는 드디어 엄마가 할 몫은 다 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6월에는 죽기 전에 애플망고는 먹고 죽어야겠다시며 때깔 좋은 애플망고를 시켜서 드시고는 전부 다 토해내셨다.
엄마는 6월 중순에는 이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야윌 대로 야위어서 곱고 예쁘고 통통하던, 내가 평생 알던 우리 엄마의 모습이 아닌 악액질로 뼈만 남았는데 복수가 가득한 아픈 엄마의 모습. 목소리도 더 이상 내가 알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매일 같이 낯설어지는데 이제 눈도 보이지 않는다니. 앉아계시던 엄마를 눕혀드리고 침대 위쪽으로 끌어올리는데 엄마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는 보드랍게 쓰다듬으셨다. 내가 기억이라는 걸 하고 나서 엄마가 내 뺨을 이렇게 감싸주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 사랑해…라고 했다. 엄마도 사랑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 엄마는 죽는데, 엄마가 없어지는데 무슨 말을 못 해.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살아서 너무 감사해. 엄마 평생 돈 때문에 힘들었지 미안해 엄마 호강시켜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엄마 우리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 내 걱정하지 마. 엄마 나 행복하게 살 테니까 꼭 지켜봐 줘.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
엄마는 진통제의 도움도 없이 암성 통증을 온몸으로 겪어내셨는데 아빠 때와는 달랐다. 엄마는 돌아가시는 날 아침까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는 이렇게 내 말을 알아듣는데 오늘 돌아가시진 않겠다 싶어 엄마 지인분들이 계신 틈에 회사에 급한 일을 빨리 마무리해 놓고 며칠 연차를 내러 간 사이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작년 여름에 공공근로를 하셨다. 동사무소에서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하셨다고 했다. 엄마 가 공공근로 첫 월급을 타시던 날 엄마랑 흑염소탕을 먹었다. 그 더운 날에도 씩씩하게 계단을 걸어내려가고 같이 흑염소탕을 먹으면서 월급으로 딸에게 한턱쏘며 뿌듯해하시던 엄마가 1년 뒤에는 이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분명 살아있었는데. 엄마가 없다. 평생 나를 배웅해 주고 마중해 주시던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게 현실 같지가 않다.
엄마 생일에 케이크를 들고 활짝 웃고 계시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해서 장례식을 치렀다. 49재를 치르고 엄마 옷장을 정리했다. 엄마는 남한테 옷을 얻어 입는 걸 싫어하셨다. 누가 나랑 동생 입히라고 입던 옷을 주면 받아다가 몰래 버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누구한테 주는 것도 싫어하셨다. 엄마 옷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엄마 성향을 존중해서 다 버리기로 했다. 엄마 옷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세탁해서 정리된 소박하고 해졌고 옛날 옷들이었다. 엄마 속옷, 엄마 내복, 엄마가 밭일할 때 입던 옷들, 엄마 겉옷들…. 엄마 옷에 얼굴을 묻으니 엄마 향기가 난다. 같은 세제를 써서 빨래하는데 엄마 옷에는 엄마 향기가 나네. 엄마가 예전에 이거 너 입어 했을 때 누가 내 나이 또래에 이런 옷을 입어? 안 입어! 했던 조끼랑 티셔츠를 두고두고 입으려고 챙겼다. 엄마 생일에 내가 사드린 점퍼인데 그것도 내가 입으려고 챙겼다. 우리 엄마 평생 돈 안 쓰고 안 입고 안 먹고 자식한테만 돈 쓰면서 입으시던 엄마 옷들도 안녕.
나는 작년 6월부터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우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때때로 공황상태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서 매일 먹고 있다. 기분이 제로 상태가 되고 나서 예전에 내가 마이너스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동생의 방으로 매일같이 찾아가던 일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동생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별로 없어서 브런치에 글을 썼다. 그리고 이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혼란스러움, 슬픔, 고통을 달래고 싶어서 이해받고 싶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쓴 책을 닥치는대로 찾아서 사들였다. 읽다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문장을 만나서 눈물이 쏟아지던 때에는 도저히 이어서 읽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책장을 덮었다. 그때로부터도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얼마 전 다시 그 책을 펼쳤는데 이제는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장을 보면서 눈물은 쏟아지지만 호흡이 가빠지기보다는 세상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일로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은 재앙과 같은 일을 겪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깊은 슬픔 속에서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자기만의 속도로 방향으로 제대로 애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 세상이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빠르게 지워버린다 해도,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세상에서 좀 동떨어진 외딴섬에 홀로 있는 것 같아도 다 괜찮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 괜찮다고.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도, 괜찮은 듯 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슬픔의 절벽 아래로 추락해서 나뒹구는 나날을 보낸다해도, 웃다가 울어도, 이렇게 평생 어떻게 살지 싶어도, 사는게 지긋지긋해도, 다 괜찮다고.
이토록 슬프다는 건 그토록 사랑했다는 뜻이니까. 내 슬픔은 내 사랑만큼이니까. 난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정신승리하면서 난 오늘도 다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오늘 하루를 살아본다.
엄마한테 엄마 없이도 잘 살아보겠다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했으니까 노력해야지. 엄마한테 나 꼭 지켜봐 달라고 했는데 행복하게 사는 척이라도 해봐야지.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우리 엄마가 남의 집에서 다림질 7시간씩 해가면서도 남편한테 월급봉투 한 번 못 받아봤어도 악착같이 살면서 지켜낸 인생인데. 나 우리 엄마 딸인데 나 함부로 인생 낭비할 수는 없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보다 저세상에 더 많이 있어도,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도, 내 세상은 지금 무너질 것 같은데 바깥세상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유유히 흘러가는 게 너무나 약이 올라도 살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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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