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
한가로운 토요일 오전, 동네 찜질방에 사우나를 하러 왔습니다. 그냥 평범한 곳입니다. 시조 한 수에 농락당한 영해군의 손자 이름을 딴 이 곳은, 황진이가 아닌 코로나19에 농락당했죠. 그래서 주인이 한 번 바뀌고 지금은 어찌어찌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별날 게 없습니다. 물이 새는 수도꼭지, 폐업한지 오래된 피부관리실, 몇 가지 메뉴만 가능한 식당,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박제된 시설 등... 요즘 사람들의 기준엔 절대 추천받지 못할 만한 곳이예요.
단지 거리가 가깝다는 건 생각보다 큰 장점입니다. 때낀 자의 이동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기에, 목욕도구 외에 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건 상당히 매력적이죠. 물이 좀 새면 어때요, 다른 수도꼭지를 쓰면 돼죠.
종종 이용하는 곳이다 보니, 사물함 번호도 항상 같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공용 공간으로 가서, 체크포인트를 만드는 느낌으로 적당한 자리를 잡습니다. 그냥 빈 공간에 흔적만 남기면 됩니다.
찜질을 할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저온, 고온 한증막이랑 냉기방, 소금방... 이게 전부예요. 그래서 이용할 수 있는 곳을 다 들어가 보고 잠깐 남겨뒀던 흔적을 지운 다음 사우나로 갑니다.
사우나 역시 별 거 없습니다. 세신사, 물 새는 수전, 문신아재, 꼬맹이들이 있는 평범한 풍경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은 임금을 만납니다. 문신한 사람, 배나온 아저씨, 동네 꼬맹이들 등등... '옷을 입으면 안된다'는 단 한가지 규칙만이 있는 이곳에서 밖에서 아무리 잘나봤자 사우나에선 모두 똑같다는 교훈을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