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세상은 라이언과 춘식이가 지배했더라도...
2010년 9월,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적응을 위해 구입한 서적에 있던 추천 어플 목록에 '카카오톡'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모바일 메신저가 일상이지만, 15년 전엔 완전 신세계였죠. 통합메시지함을 관짝에 밀어버리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모티콘이라는 개념도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특수문자를 조합하거나 통합메시지함에서 제공되는 한정된 감정의 전달만 했던 기존과 달리, 좀 더 디테일하게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태어났고, 카카오톡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로 그 친구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누군지 다들 아시죠?
저마다 콤플렉스를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귀여운 캐릭터. 관련 상품이 지금도 많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상당하지요? 무슨 연예인 같습니다. 심지어 인기투표도 해요. 카카오톡 초창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이 캐릭터들을 접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무지'라는 노란 캐릭터에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단무지에 토끼옷을 입혔다는 설정이라니요. 얼마나 귀엽고 기발한가요? 개성 있는 다른 친구들도 있습니다만, 제 마음속 원픽은 항상 '무지'입니다. 심지어 평소 썩 선호하지 않던 단무지까지 즐겨 먹는 반찬이 될 정도로 말이에요.
스마트폰의 발전과 함께 '무지'의 생동감이 점점 발전해 나갑니다. 이모티콘의 종류도도 추가되고, 심지어 움직이는 것까지 채팅창에 보낼 수 있게 되었지요. 터치 한 번에 제가 선택한 '무지'가 춤도 추고, 깔깔 웃고, 밥도 먹고 운동도 합니다. 얼마 전엔 '무지'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까지 나왔습니다. 카카오프렌즈 한정판 셜록 홈스 시리즈를 구하려고(거기선 '무지'가 존 왓슨으로 변장합니다) 중고 서점을 돌아다닌 적도 있습니다. 온 세상이 '무지'로 뒤덮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도 해봤을 정도니... '무지앓이'도 이쯤이면 상당한 중증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 캐릭터의 생명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했습니다... 만, '무지'의 아성을 위협하는 카카오프렌즈의 강력한 새 캐릭터가 2016년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라이언'의 등장으로 제 최애캐 '무지'의 자리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지'는 원래 카카오톡의 주인공으로 기획된 만큼 이런저런 혜택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라이언'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단체 이모티콘의 가운데 자리를 양보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까진 괜찮았습니다. 단독 이모티콘도 여전히 건재하고, 캐릭터 상품도 꾸준히 나왔거든요. 하지만 4년 뒤 또 다른 캐릭터의 등장으로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옵니다.
'춘식이'까지 등장하면서 저의 '무지'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난 것도 억울한데, '라이언'과 '춘식이'가 점령한 카카오프렌즈 세상은 더 이상 '무지'의 설 자리는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오프라인 매장에도 '무지'를 포함한 다른 캐릭터 상품 비율이 많이 줄어버렸어요. 그렇다 보니, 이젠 카카오프렌즈샵에 구경을 가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속 원픽은 당연히 '무지'입니다. 굳이 이유를 꼽자면... 천진난만한 성격, 때 묻지 않은 순진함을 간직한 호기심 많은 밝은 성격의 캐릭터라서? 좀 더 원초적인 이유라면 그저 귀엽습니다.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위에도 언급했지만 노란 단무지에 토끼옷을 입혔다는 설정도 기발했고요. 제 성격상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자리 잡은 캐릭터가 있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한때 온갖 굿즈를 모아보려는 생각도 했습니다. 빵을 먹으면 들어 있는 스티커도 꽤나 많이 모았었고, '무지'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 방영됐을 때, 정말 진지하게 OTT 가입을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현실의 벽에 부딪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겁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캐릭터,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하드보일드 하다고 해도, 자기만의 시선으로 즐겁게 바라보는 여유와 느긋함을 남겨두고 살아가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순진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게 순진함을 지키는 방법이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여하튼, 제 원픽인 '무지'의 순진무구와 천진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라이언과 춘식이가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공격한다 한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