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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Nov 17. 2019

우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수영장에 간다

수영 배우러 갔다가 알게 된 것들_10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 사람들을 만나면 수영 얘길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던 내가 다들 무슨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 동료가 수영을 배운다고 했다. “수영 너무 재밌지?” 반가워하는 나와 달리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는 평영을 배우려고 수영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평영 실력이 너무 안 는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평영인가. 그는 “얼굴을 물 밖에 내놓고 헤엄칠 수 있는 유일한 영법이라서 물에 빠진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헤엄쳐 가 구조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영을 배운다니. 이렇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수영을 배울 수도 있다는 것에 많이 놀랐다.

외국에서 1년간 지내다 온 또 다른 동료는 최근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당분간 늦잠을 자고 몇 개월 후에나 수영을 등록하는 거였다고. 그런데 회사 일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받게 되자 계획보다 빨리 새벽 수영을 끊었다고 한다. 그는 “수영 하고 출근하니까 좀 살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겐 수영이 마음을 정돈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았다.




그들을 만난 후 ‘나는 왜 수영을 배울까’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나도 뭔가 근사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2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수영을 하는 게 재미있다. 그리고 수영장에 있는 게 편하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지도, 회사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익명의 시공간. ‘아이 기저귀 주문할 때가 됐나’ ‘프라이팬에 있던 오징어볶음을 냉장고에 넣었던가’하는 잡다한 걱정, 많은 업무를 빨리 처리하며 늘 웃는 얼굴로 동료들을 대해야 하는 긴장으로부터 완벽히 해방된다.


나는
‘혼자 편하게, 재미있게 놀고 싶어서’
수영을 한다.


하지만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나이, 세 살 여섯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 나는 이 시간을 누리기 위해 비정한 엄마가 돼야 한다. 내가 새벽 수영을 가는 날이면 아이들은 깨자마자 엄마를 찾다가 눈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걸 안다. 매달리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은 출근 준비조차 제때 못하고 동동거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걸 모른 체 하고 수영장에 간다.




과거의 나였다면, 새벽 수영은 다닐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스스 잠에서 깬 아이들과 웃으며 눈 맞춤하고 온 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아이들의 아침을 기분 좋게 열어주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부단히 애쓰던 시절이었다면. 전날 야근을 하고도 출근시간보다 빨리 나가 시키지도 않은 업무까지 하며 ‘유능한 직장인’이 되려고 애쓰던 나였다면.


하지만 나는 내가 되려고 애쓰던 것에 닿지 못했다. 둘 다 되고 싶었으나 어느 것 하나도 되지 못했다. 처음엔 내 목표가 두 개여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워킹맘이 아니었어도, 엄마나 직장인 둘 중 하나만 한다 해도 나는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좋은 엄마, 회사가 만족하는 유능한 직원이 될 수 없음을 천천히 깨달았다.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육아든 업무든 잘하고 싶어 매달리고 집착할수록 사소한 일에도 크게 좌절하게 되고, 결국 번 아웃되고 마는 사람이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됐다. 어떤 일이든 적당한 거리를 둬야 다치지 않는 사람, 그게 나란 걸 여러 번 불에 데고 나서야 깨달았다.


좋은 엄마,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내가 애틋하고 그 시간들이 소중하다.


다만, 이제 더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한다. 사회나 회사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지우지는 말자고. 내가 좇던 이름들은 희생이 당연시 되는 이름이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다해도 결국엔 닿을 수 없는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엄마도 유능한 직장인도 ‘아무것도 되지 말자’고, 나는 일부러 자꾸 되뇐다.




물론 그 거리두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전히 좋은 엄마, 유능한 직원 타이틀 근처를 서성이고 기웃거린다. “다른 친구들은 다 엄마가 와서 축구 유니폼 입혀줬어”라는 첫째의 말에 목이 메고, 동료들의 뛰어난 업무 성과에 대해 들으면 와그락바그락 마음이 온통 돌밭이 된다. 나는  여전히 워킹맘인 게 죄스러운 하나도 쿨하지 못한 엄마이고, 회사에서도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쫄보 직장인이다.


그럼에도 거리를 두기 위해서, 그 벌어진 틈에 조금씩 나를 들여놓기 위해서 나는 수영장에 간다.

아침엔 집에 없지만 저녁에 돌아와 더 오래 눈 맞추고 귀 기울이는 엄마.

남들보다 오래 일하진 않지만 업무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알맞은 성과를 내는 직장인.

온갖 근심 걱정 다 잊고 물에 둥둥 떠서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세 명의 내가 오순도순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수영장에 갈 것이다. 비록 아이들이 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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