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배우러 갔다가 알게 된 것들_09
9월이 왔을 때, 내 수영의 한 시절이 끝났음 직감했다. 수영장 물이 차가워져 몸이 오슬오슬했고, 선생님이 바뀌었다. 수영을 대하는 나의 마음 같은 것이 바뀔 수도 있겠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영을 처음 시작한 6월 초부터 여름 내내 나는 달떠 있었다. 갓 연애를 시작한 애인처럼 수영 생각이 하루종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유튜브 영상을 보고 환승하는 통로에서 팔 동작을 해보던 내가 그 여름에 있었다. 수영에 관심도 없는 친구들을 붙잡고 “수영 너무 재밌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3개월을 보냈다.
찬바람이 불며 지상 10cm 쯤 떠 있었던 발이 다시 땅에 닿았던 걸까. 수영을 생각하는 시간, 수영 영상을 보는 시간이 줄었고 아무나 잡고 수영 얘길 꺼내지도 않게 됐다. 수영에 대한 마음이 ‘너무 좋아 죽겠어!’ 호들갑에서 ‘좋아’ 정도로 차분해졌다. 이대로 서서히 수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식는 건 아닐까,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조금 흔들리기도 했던 것 같은 그 때의 나를 잡아준 건 접영이었다.
나는 접영이 어떤 영법인 줄도 몰랐다. 수영을 배우고 나서야 상체가 물 위로 힘차게 올라오며 돌진하는 그 영법의 이름이 접영이란 걸 알게됐다. 튀어오르듯 쑥 올라오는 어깨와 현란한 팔동작, 이 물밖 동작만 본 나는 접영이 가장 박진감 넘치는 영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물밖 모습만 그랬다. 접영 첫 시간, 선생님은 접영 발차기라며 웨이브 시범을 보여줬다. 가지런히 모은 두 발로 물을 꾹 누른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으로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헤엄쳤다. 선생님의 웨이브를 보며 처음엔 놀랐고, 그 다음엔 한숨이 나왔다. 놀란 것은 박진감 있는 상체 동작과 달리 하체 동작은 한없이 여리여리했기 때문이고, 한숨이 나온 것은 뻣뻣하고 리듬감 없는 내 몸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태 남들 앞에서 춤 한 번 제대로 춰본 적 없는 각목인 내게 웨이브는 감히 엄두도 내기 힘든 고난이도 동작처럼 보였다.
20대 때 TV에서 연예인들이 춤추며 웨이브 하는 걸 보다 혼자 따라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어색하고 우스운 몸놀림에 황급히 웨이브 시도를 멈췄다. 그 후론 웨이브를 해볼 생각조차 않고 살았다. 그런데 수영장에서 하게될 줄이야.
모든 영법을 배울 때마다 반복되던 똑같은 결론이지만, 웨이브 역시 킥판을 잡고 계속 연습하다보니 조금씩 느낌이 왔다. 온 몸에 힘을 뺀 상태에서 모은 두 발로 물을 꾹 누르면 상체가 물 속으로 들어갔고, 그 때 가슴을 펴며 앞으로 나아가면 발끝까지 웨이브가 됐다. 몸이 라면처럼 곱슬곱슬한 모양을 그리며 수면 위를 오르락 내리락했다.
공기 중에선 한 번도 된 적 없는 웨이브가 수중에선 되다니! 맨 처음 내가 제대로 웨이브를 했다고 느꼈을 때 온 몸이 전율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웨이브가 내 몸을 차례로 통과할 때의 짜릿함. 나는 웨이브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몸을 통한 자기 세계의 확장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까지 넓혀주는 걸까. 웨이브의 기쁨을 안 후 사람들이 나이트와 클럽에서 왜 그렇게 웨이브를 하며 춤을 추었는지 그 마음까지도 알 것 같았다. 나는 물 속 춤꾼이라도 된 듯 웨이브로 유아풀을 누볐다.
물론 여기까진 킥판을 잡고 웨이브만 연습하던 접영 1단계 얘기다. 웨이브가 익숙해지며 물 속에 들어갈 때 차는 입수킥과 상체를 띄울 때 하는 출수킥을 배웠고, 한팔로만 접영을 하며 팔과 다리의 호흡, 입수 출수의 타이밍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두 팔을 힘차게 저으며 물 위를 뚫고 오르는 양팔 접영까지 배웠다. 접영은 마치 인어가 헤엄치듯 부드럽고 유연한 영법이었고, 배울수록 힘 보다는 리듬감이 중요하단 걸 알게됐다.
머리로 깨우친 리듬감이 몸으로 재현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래 입수킥과 출수킥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고, 상체가 물밖으로 나올 때 다리를 차서 몸을 1자로 만들어야 하는데도 발이 물밖에 둥둥 떠 있었다. 힘차게 머리 앞으로 돌아와 11 모양으로 입수해야 하는 팔도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박자와 리듬이 몸에 익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동작들을 한 번에 하려니 마음만 급해져 킥판을 잡고는 됐던 웨이브마저 잘 안 돼 낙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웨이브의 짜릿함을 기억하며 계속 접영을 연습했다. 그리고 얼마전 선생님으로부터 "다리만 모아요, 딴 건 다 좋아요"라는 접영에 대한 첫 칭찬을 들었다. 나 스스로도 수영이 잘 되는 것 같다고 느낀 날 선생님의 칭찬까지 받아 참 좋았던 날. 접영 웨이브에 처음 성공한 후 늘 그랬지만 그날은 유독 웨이브의 느낌이 온 몸에 남아 하루종일 리듬을 타며 지냈다. 물론 남들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내 마음 속의 수중 웨이브 리듬.
11월 중순, 휴대폰 알람에 눈을 뜨면 사방이 깜깜하다. 수영을 가려면 거쳐야 하는 단계들이 자주 아득하게 느껴진다. 더 자고 싶어 침대로 파고드는 몸을 추운 이불 밖으로 꺼내기,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양치하기, 출근할 옷으로 갈아입기, 어둠과 추위를 뚫고 셔틀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
수영장에 가느냐 마느냐, 비몽사몽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접영은 여러번 내 몸을 이불 밖으로 꺼내주었다.
나는 웨이브의 기쁨을 알고, 내 몸은 물속에서만 웨이브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