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진묘(眞眞妙)

by 김수권

장욱진 화백께서는 오직 그림만 그리셨을 뿐 생계를 책임지거나 가족을 부양하지는 않으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 화가라는 직업은, 만약 유명하지 못해 돈벌이가 시원찮다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변변치 않은 사람'으로 무시 당하기 십상이었을 텐데, 보란듯이 가정의 경제 사정을 등한시하셨던 화백의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본다면 그 자체만으로 '무책임한 사람'으로 규정 받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화백께서는 당신이 화가인 것을 '직업'으로 보지도 않으셨던 것 같다. 직업이라는 것은 생계유지를 위해 종사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나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시지는 않으셨으니까 말이다.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서울대 교수라는 자리도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그만두셨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반면에 그렇다고 화백께서 스스로 대단한 그림을 그리는 순수 예술가라 생각하신 것도 아니었다. 화백께서 남기신 말씀처럼 그저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하는 구실로 여기셨다.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답답할 정도의 생각이겠지만, 과거에는 사실 사람의 '기능'과 '예술'의 구분은 없었거나 매우 희박했다. 즉 기능(또는 기술)을 가진 사람과 예술을 하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았고 저마다 갖고 있는 기능이 있어 훌륭하게 만들어낸 것이 곧 예술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화 내지 근대화를 거치면서 기능을 가진 사람과 예술을 하는 사람이 분리되었고, 예술가도 하나의 직업,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만의 특별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술이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되고 멀어진 것도 이런 시대 변천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비록 장인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 엄청난 고가에 팔리는 상품이 있더라도 이를 '명품'이라고만 하지 '예술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의미심장하다. 장인은 기술자이지 예술가가 아닌 것이다.


여하간 화백께서는 돈벌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이런 화백을 대신하여 생계를 이어나가고 아이들을 양육한 것은 화백의 부인이신 이경순 여사님이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돈을 벌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평가를 함부로 하기 때문에 남편이 돈을 벌기는커녕 돈 벌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경순 여사님의 심정이나 고충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보통의 경우 가정불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백의 가정에는 불화가 아니라 사랑과 존경, 희생과 헌신, 신의 같은 고귀한 가치들이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화백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진진묘'(1970)와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진진묘'(1973)이다.


이 작품에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어느 날 화백께서 불제자였던 부인이 불경을 읽는 모습을 보시고는 영감을 얻어 즉시 시골로 내려가 일주일간 불음불식(不飮不食)하며 첫 번째의 '진진묘(1970)'를 그리셨다고 한다. '진진묘'는 부인 이순경 여사님의 법명이었는데, 아내를 '내 여자' 또는 '자기와 결혼한 여자', '아이들 엄마'와 같은 보통의 남편들이 생각하는 인식 수준이 아닌, '부처'의 모습으로 그리셨던 것이다. 그것도 일주일 간이나 식음을 전폐하면서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서 말이다. 그런데 화백께서 이 그림을 완성하신 이후에 몇 개월을 앓아눕는 일이 벌어졌고, 이순경 여사님은 그 그림 때문에 남편이 병을 앓게 되었으니 이를 불길하다 여기시어 내다 팔아버리셨다고 한다. 이것이 몹시 아쉬우셨던지 아내를 부처로 바라보는 그 마음을 다시 한번 그려내신 것이 또 다른 진진묘(1973)이다.


긴 세월이 흘러 첫 번째의 '진진묘'가 약 30여 년 만에 경매에 나왔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미 작고하신 화백께서 부인을 그린 첫 번째 그림이자 불교를 소재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추정가액이 무려 4억 5천만 원이라는 기사였다.


이렇게 세상에 다시 등장한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온당치 않은 것이었다. '첫 번째'이니 '최초'라는 것만으로 작품의 희소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화가 자신도 이 그림이 자신의 대표작이라 생각해 (아내가 이 그림을 내다 팔았을 때) 아까워했다는 설명은 모욕적이기까지 했다.


어떤 작품의 희소성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지만 희소성을 오직 제작 시기나 남아 있는 개수, 소재나 기법과 같은 형태적인 것에서만 찾는 것은 때로 작품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망각하게 한다. 가령 어떤 작품에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정신, 마음, 혼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희소가치일 것인데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진묘'는 '아내를 향한 화가의 마음'이 담긴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희소성인 것이다. 한 남자가 아내의 모습을 부처로 형상화하기까지 가졌을 마음과 그것을 담아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성심을 다한 정성이야말로 이 작품을 고귀하고 위대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유이다.


작품에 대해 값을 매기는 것까지 탓할 일은 아니지만, '화가가 자신의 대표작이라 생각해 아까워했다'고 하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고 진위를 따져 묻고 싶을 만큼 모욕적인 것이다. 대표작이어서 아까워 했다니, 그렇다면 대표작인 줄도 모르고 내다 팔은 아내를 탓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화백께서 이 그림을 아까워하셨다면, 그것은 '대표작' 따위가 아니라 아내를 그린 그림이 화백 자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수중이 아니라, 아내에게 바치려고 했거나 자신이 평생 간직하고자 그린 그림을 그만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는 마음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이순경 여사님의 마음이다. 남편이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 더욱이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을 텐데, 오직 남편의 병을 염려하여 팔아버린 아내의 마음도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화백께서 그런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을 것이므로 그것을 내다 팔았다고 탓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값을 매기면서 함부로 하는 말은 따지고 보면 두 분의 마음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 할 수 있다.


화백께서는 생전에 '화백'이라는 말에 질색하시면서 집 가(家)가 들어간 '화가'로 불리기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맏 백(伯)'이라는 글자 하나마저도 애써 거부하신 모습에서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으셨던 자애로운 인품을 엿볼 수 있고, '집 가(家)'라는 소박한 글자를 좋아하신 모습에서 '가정'과 '아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화가를 높여 부르는 말이 '화백'이니, 나는 그저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화백'을 흠모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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