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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일하기가 싫을까?

번아웃의 이유 찾기

by 나의신디

아, 정말 일하기 싫어도 이렇게 싫을 수 있을까?


벌써 3개월째다. 아니 더 오래되었다. 작년 10월부터 아파서 일을 놓기 시작했다. 끙끙 앓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으나 병원에 간다거나 약을 처방받지도 않았다. 그저 감기 몸살을 지독하게 앓나 보다 싶어 감기약과 조청등을 먹으며 내일이면 나아지려니 버티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꼬리뼈 위로 굳은살이 떡살처럼 앉아서 놀랍기도 했다.


나이 들면서 이렇게 한 번씩 아프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이 아팠던 것도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이 만들어낸 일 같다.


몸이 좀 괜찮아진 이후로도 일하기 싫은 마음은 여전했다. 갑자기 대청소를 시작했다. 2개월여에 걸쳐 대청소를 하면서도 이것이 일하기 싫은 마음의 도피라는 것이 느껴졌다. 일로부터 도망칠 합법적 핑계였던 것이다.


가구를 바꾸고, 냉장고를 다 뒤집는 대청소를 했음에도 회사일을 할 생각은 여전히 올라오지 않는다. 대청소가 끝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끝나고 나면 또 뭘 해야 하지?


전에는 대청소를 하고 나면 환기가 되고 새로운 활력이 돋았는데, 이번엔 어림도 없다. 문 하나만 열면 사무실이지만, 그 문을 여는 것이 마치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괴롭다. 그제야 이 일이 단순히 '일하기 싫은 번아웃' 증세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일하기가 싫을까?'


나를 분석하고 탐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드는 첫 생각들을 관찰하고, 모닝페이지를 쓰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산책을 하고 미용고사를 하며 내 영혼에 흐르는 단어나 문장들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디자이너가 너무 미워!'

일하기 싫은 마음은 디자이너의 라벨 디자인 결과물을 받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체 상품의 라벨을 리뉴얼해 주기로 했던 약속과 달리, 단지 로고 하나만 달랑 추가해 놓고 행간 조정도 하지 않은 채 작업 결과물을 보내왔다. 새로운 디자인을 해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작업 결과물을 받고 암담해졌다. 리뉴얼이라는 개념이 그녀와 내가 이렇게 달랐나 보다. 수정방향을 피드백해야 하는데 그 일을 쳐다보기도 싫다. 그때부터였다. 차일피일 일을 미루며 일하기 싫다고 떼쓰기 시작한 것이.


'너무한 거 아니야? 돈은 이미 다 받아 놓고, 배짱부리는 건가? 오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먼 길 달려와 마치 우리 사업의 방향을 잡아줄 것처럼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더니, 이게 다 뭐야? 로고 붙이는 일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야. 굳이 돈 내고 할 일이 아니라고. 이게 전문가라는 디자이너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말도 안 돼.'


그녀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 솟구쳐 올라옴과 동시에 나의 현재가 알아차림 되었다. 그녀에게 기대가 너무 컸다. 내 사업의 구세주처럼 보였던 그녀에게 나는 엄마 투사를 했다. 마치 나를 보아주지 않은 엄마가 밉듯이. 나는 그녀에게 실망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당신과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은 디자이너이고, 나는 의뢰인입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만큼, 내 수준만큼, 나에게 맞는 디자인을 해줄 뿐입니다. 당신은 제 엄마가 아닙니다. 당신은 나의 요청을 정확히 이해하고 제가 요청드린 일을 해주세요."


그녀에 대한 영혼의 혼란을 정리했음에도 일하기 싫은 마음은 그치지 않았다. 3월 하순 무렵에 이르러, 남편과 직원들에게 당분간 오전 근무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계속 업무를 회피하는 나를 보여주기도 민망했지만, 지금 이 상태를 방관해서도 안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나는 나를 도와야 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상림 숲으로 달려가 맨발 걷기를 다시 시작했다. 상림 숲에 이르러서야 숨이 좀 쉬어졌다. 브런치 글쓰기도 상림숲에서 갑작스럽게 시작했다. 글쓰기도 나의 숨통이었는지,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산책을 마치면 목욕탕에 들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긴장을 이완시켰다. 목욕탕이 그렇게 울기 좋은 장소인지 첨 알았다. 샤워기 물줄기를 따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나면 좀 살만해서 오후에는 사무실에 출근해 급한 일들을 해결했다. 그래도 아침이 오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도대체 왜 이럴까?'


상림에 다니기 시작한 지 3-4일쯤 된 어느 아침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키며 내 안에 흐르는 생각들을 맞닥뜨리고 기가 막혔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들.


'아,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살지? 하루가 싹둑 잘려나가서 그냥 저녁이면 좋겠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 아침이 너무 싫어.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


얼마나 일하기가 싫고 힘들면, 아침에 눈뜨자마자 저녁이 되길 바라고 있을까?

얼마나 힘들면, 하루를 싹둑 잘라 버려 버리고 싶을까.

신디야, 너 정말 그렇게 힘들었구나.


나 자신이 너무 가엾다. 그렇게 힘든데도, 힘들 줄도 모르고, 나를 방치하고 살았다는 자각이 일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니, 나의 내면이 무너져 내리고, 이렇게 방치하다간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병이 스며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림으로 가는 길에 팔순 엄마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살면서 내게 닥친 어려움을 엄마에게 호소해 본 적이 없다. 내게 엄마는 '가여운 엄마, 힘든 엄마'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새벽부터 장사를 나가시고 초저녁이면 곯아떨어지시는 엄마에게 내 힘든 일을 상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엄마, 나 이게 힘들어. 이것 좀 도와줘'

'엄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엄마, 친구가 나를 피해 다녀서 너무 마음이 아파'


이런 호소나 도움요청을 엄마에게 해 본 기억이 없다. 이유는 분명하다.


"엄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딸은 엄마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


엄마를 불쌍하게 보는 순간, 엄마보다 내가 더 커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커야 엄마를 돌볼 수 있다.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는 순간, 엄마의 엄마가 되려 가망 없는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딸이 된다. 그러니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엄마, 엄마는 크시고, 저는 작습니다.'


가족 세우기 최고의 문장을 읊조리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기면 나는 엄마의 작은 딸로 돌아온다. 엄마의 보살핌 속에 생명을 이어온 작은 존재가 된다. 엄마 살아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나는 엄마의 작은 딸로 엄마에게 내 고통을 호소해보고 싶었다. 엄마의 이해를 받고 싶었다.


"엄마, 엄마도 장사 나가기 싫고, 아무 일도 하기 싫을 때가 있었어?"


"왜?"


"응, 내가 요즘 좀 힘든지, 아무 일도 하기가 싫고 그래서."


"그럴 때 있지, 힘들 때는 쉬엄쉬엄 해라. 니 몸 생각하고 너무 일에 매달리지 말아!"


엄마의 목소리에 근심이 차오른다.


"응, 그래서 지금 일 안 하고 산책하러 가는 중이야. 나도 이런데, 엄마는 더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도 일하기 싫고 그랬어?"


"그랬지, 새벽에 일어나서 손이 쩍쩍 달라붙는 다라를 이고 봉천동 길을 걸어가면 무섭기도 하고, 일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고 그랬지."


"엄마는 그때 어떻게 했어?"


"그래도 어떡하니, 너희들이 있는데, 힘들어도 참고 살았지."


"그랬구나. 엄마 고마워, 그 힘든데도 참고 우리를 키워줘서. 엄마 덕분에 우리가 살았네."


"너는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라!"


"응, 그럴게. 엄마도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전화를 마쳤지만, 가슴이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엄마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을까? 엄마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었을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쉬어라, 내려놓아라, 애쓰지 말라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내 발목을 잡아끌고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저녁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하루가 너무 막막해요."


나는 왜 이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까?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번개 가족 세우기 세션을 의뢰하고, 대전으로 달려갔다.

인도자 조남희 선생님은 내 이슈를 듣자마자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선생님의 정서가 아니고, 엄마 것을 가지고 온 거예요.

선생님 것이 아닌데, 그냥 행복하게 사시면 되는데, 안타깝네요. "


내 것이 아니라는 말에, 정신이 차려졌다.

내 삶에 많은 부분에서 연결되어 있는 엄마, 엄마의 정서를 내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고? 이 일이 내 삶에서 일어난 정서가 아니라, 엄마의 정서를 내 것 인양 느끼며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었다고? 어이없지만, 무의식을 공부하다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정서의 대물림인 것이다.


나와 일하기 싫은 마음의 대역을 세웠다. 내 대역은 장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눈을 감고 축 늘어진 채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 무의식의 상태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정서의 근원은 엄마였다. 엄마는 삶이 무거워 호주머니에 있는 것조차 모두 꺼내서 내던지며 넓이 나간 모습으로 삶 위에 서서,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도 살아야지'를 되뇌고 계셨다.


엄마, 그러셨군요.

그렇게 고달프셨군요.

그렇게 무거우셨군요.

온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시고, 그렇게 무거우셨군요.

엄마의 고달픈 삶의 무게를 이제야 제대로 뵙습니다.

엄마의 마음속 고뇌를 이제야 제가 알겠습니다.

엄마, 그러셨군요.


세우기 언어가 이어지면서 깊은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이것이 엄마의 정서였다니, 그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 정서이고, 내 것인 줄로만 알았다. 내 삶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길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 해결책만 찾았다. 정서조차 대물림된다는 것을 깜박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알았다. 엄마의 시간을. 엄마의 고통을. 어린 네 자녀를 키우며 다라를 이고 행상을 다니셨던 엄마의 하루를. 수위들에게 쫓기며,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5층을 수박 다라를 이고 올라 다니셨던 엄마의 시간들을. 그 속에서 엄마가 느꼈을 그 막막함과 어서 끝나길 바랐던 고통들을.


아, 엄마, 엄마가 지금의 저처럼 그렇게 사셨군요.

하루하루가 빨리 끝나면 좋을 것처럼 고통 속에 사셨군요.

엄마를 이해한다고 해도,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엄마의 고통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 나를 인정해 주 시 않았느냐,

그렇게 살림을 시켜 놓고 왜 칭찬 한마디 안 했느냐고, 엄마에게 따졌어요.


세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엄마의 감정을 이렇게 반복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일 같다.

엄마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지켜내셨는지, 깨달으라고, 경험해 보라고 이런 이슈가 올라온 것이다.


한때 나는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는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원망했다.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엄마로부터 흐르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엄마를 비난하는 마음이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사랑이 가슴 위에 멈춰 서서 흐르지 않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내게는 왜 사랑이 흐르지 않을까 답답했는데, 그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이 알아졌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믿는 작디작은 마음,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믿는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그렇게 천둥 치고 폭풍 몰아치는 시간이 내게 찾아왔던 것이다. 저 깊은 무의식 속에 감춰두었던 엄마의 고통을 따라 하며 사랑을 배우기 위해, 가슴으로 알기 위해, 지난 3개월간 애를 쓰며 길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마음속 기도가 흘러나온다.


엄마, 용서하세요. 제가 모르고 그랬습니다.

당신이 홀로 견디셨던 그 고통의 시간을 이제야 제대로 느낍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직접 겪기 전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당신이 지나온 그 세월의 압박감을 정말 몰랐습니다.

하루하루가 무서울 만큼 고통스러우셨다는 걸 정말 몰랐습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밤이 되길 갈망하셨던 그 고뇌를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가슴속 박혀있던 원망의 톱니바퀴가 쏙 빠지고, 엄마의 사랑이 샘물처럼 내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엄마,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모든 것이 다 잘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 속에 태어나 수고로움 속에 자란 작은 영혼입니다.

그 수고로움이 사랑임을 이제야 압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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