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농 이야기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운명적인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그 선택으로 인해 인생이 뒤바뀌고, 삶이 달라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내 삶을 뒤바꾼 가장 절묘했던 선택 한 가지를 꼽는다면, 나는 단연코 37세 미혼이었던 내가 홀로 지리산으로 귀농하기로 결정한 그날을 꼽는다.
시골생활은 경험해 본 적도 없거니와, 시골에 가본 적도 몇 번 되지 않는 서울 출생이었다. 농사 경험은 대학 때 농촌활동 경험뿐이고, 상추 한 포기 내 손으로 심어 본 적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모아 놓은 재산이 많아서 생활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시골 생활을 해나갈 동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산골생활을 동경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만난 시 한 구절 덕분이었다.
스물아홉 고개에서 드라마 습작을 시작했다. 90년대 전설의 고향도 집필하고, 명절 때마다 틀어주던 김희선의 춘향전도 집필했다. 모두 다른 사람이 쓰다가 포기한 작품 들이다. 어찌된 일인지 내 창작물보다 문제가 발생한 작품의 문제 처리 작가로 자꾸 불려다녔다. 다른 사람이 기획하고 준비하다가 포기한 것이니 온전히 나의 창작물이라는 기쁨이나 내 작품을 해냈다는 만족감은 크지 않았다. 물론 원고료도 원작자만큼은 아니었다.
6개월간 낮과 밤을 바꿔가며 6개월에 걸친 일요 드라마 한편을 마치고 났을 때, 내 삶은 '조기폐경'이 올 거라는 한의사의 경고를 들을 만큼 피폐해졌다. 발톱은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밤에는 잠들지 못했다. 낮에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멍한 상태가 되어 허공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갑자기 전기가 끊겨 11층 아파트를 걸어 올라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불안에 시달렸다. 수도를 틀면 검은 폐수가 콸콸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공황장애'의 증세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저 우울증이나 조기 폐경의 경고장을 받을 뿐이었다.
그때 우연히 성철 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책을 읽었다. 스님의 말씀 속에서 뭔가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보았다. 스님은 떠나고 안계시지만, 그래도 스님이 주석하셨던 백련암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 절에 머물며 진짜 나를 바로 보고 싶었다.
백련암에 머물려면 3천 배를 해야 하는 것이 규칙이라고 해서, 그것이 성철 스님이 장만해 두신 철칙이라 해서, 멋모르고 3천 배를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왜 한다고 했을까? 내가 미쳤지, 지금이라도 내려갈까?"
집중은커녕, 끊임없는 고통과 후회의 잡념으로 기도는 이미 물 건너가 버렸다.
그래도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기억나는 숲 속의 바람 소리 덕분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절 주위를 산책하다 보면, 먼 데서 천군만마처럼 달려오는 씩씩한 무리들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 나를 툭 치고는 무심한 듯 내 달려가버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 새벽예불 시간도 좋았다. 2시 30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간단히 씻고 마당을 가로질러 법당으로 가다 보면, 새벽의 쨍한 공기가 얼굴을 때리고 하늘에는 여전히 잔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청아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스스로 기쁘고 만족스러워서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기도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슴속에서 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한낮의 초록빛 숲, 나무와 새소리 바람 소리가 내 영혼을 맑게 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3천 배 21일 기도를 마칠 즈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어이없게도 3천 배 기도를 하는 내내 나는 산골에서 건강한 사내와 알콩달콩 농사를 지으며 두 손 맞잡고 괭이질 호미질하는 상상을 하였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라는 게, 신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어떤 것이 아님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저 내 머릿속에 가슴속에 어떤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 혹은 원래 있던 어떤 것이 떠오르는 것,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산골 생활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헬렌 니어링 부부의 책이나 소로우의 월든을 찾아 읽은 것도 그즈음이다.
가슴에는 산골 생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쌓여갔지만, 미혼 여성 홀로 시골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온몸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도할 때 보았던 그 건강한 사내를 내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드라마 쓰는 일로 돌아가야 할까? 이 역시 진저리가 났다. 이미 쥐어짤 대로 쥐어짜서 더 나올 것이 없다고 믿었다. 깜깜한 밤중에 홀로 모니터 앞에 앉아 백지를 채워 나가는 그 공포스러운 창작의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다시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럭저럭 흐르는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고, 출가라도 하라는 스님들의 권유에 혹하기도 했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가장 힘든 사람이 출가라니, 절레절레 고개가 저어졌다.
어느 날, 김천 직지사 뒤의 작은 암자로 100일 기도를 하겠다며 올라갔다.
용울음소리를 내며 거센 물을 뿜는 마당의 수각이 소란스러웠던 암자였다.
'네 신세도 참 가련하구나! 너 같은 사람 많이 봤다!'
하는 듯한 비구니 주지 스님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법당에 들어가 절을 시작했다.
3일이 지났다. 그날도 여전히 나는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며 삶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가련한 영혼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내 길이 아니었다. 이 일도 저 일도 다 힘들고 감당하기 버거웠다. 부모님의 성화나 세상 사람들의 눈길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주저앉아 갈팡질팡하다가 끝장날 것 같은 내 삶이 제일 무서웠다.
눈물이 났다. 나이 서른일곱에, 변변한 직장 생활도 경제활동도 못해봤다. 작가가 되어보겠다고 8년간 여의도 바닥을 떠돌며 시간만 죽였다. 작가 교육원 신인상까지 받으면서, 유명한 작가로 성공할 줄 알았던 내 인생은 사막 위에 내 던져진 애벌레처럼 처량하였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이번 생은 실타래가 잘못 풀린 것 같았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펑펑 울며 절을 마치고,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인자하신 부처님께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듯했다.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흘렀다.
그때였다. 법당 상단 위에 파란색 작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책을 펼쳐 후루룩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 멈춰 섰다. [순치 황제 출가 시]라는 시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출가를 했다는 게 신기해서 그 시를 읽기 시작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숨이 턱 막히며 뭔가가 와장창 깨어져 나갔다. 내 머릿속에는 벽력 같은 소리가 '쾅' 울렸고, 가슴은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다른 문장은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그 문장 하나만 커다랗게 확대되며 내 앞에 떡 하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장부 어디 간들 세끼 밥 못 먹으랴!"
아, 세끼 밥.
순간 엄청난 깨달음이 찾아왔다. 사람살이라는 것이 단지 이 세끼만 해결하면 되는 것인데, 세끼 밥 못 먹을까 봐 그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했구나. 진짜 쉬운 일인데, 이걸 못할까 봐 그렇게 망설이고 무서워하고 회피했구나. 아, 이것뿐이로구나. 이것만 있으면 다 되는 것이로구나.
단지 세끼 밥만 먹으면 되는 것을, 더 큰 것을 이루려고, 더 큰 것을 얻으려고 전전긍긍하며 괴로워 했다는 것이 그 순간 알아차려졌다.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나는 그 길로 배낭을 다시 싸서 의아해하시는 주지스님의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하산하였다. 터미널에 도착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 집 대신 지리산행 버스에 올랐다.
어찌 보면 무모한 결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월든 호숫가의 소로우처럼 외로움을 견디며 자급자족의 삶을 살겠다는 것은 허영일 수도 있다.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에 동화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삶을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 선택의 순간, 내 가슴은 뛰었고, 혼돈이 사라졌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했다. 이러저러한 핑곗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찾았던 길을 드디어 발견한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성큼성큼 나는 나의 온전한 삶을 찾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가슴은 후련했고, 마음은 통쾌했다. 무서울 것이 하나 없고 걱정될 일도 하나 없었다. 내 앞의 어떤 장애도 더 이상 장애가 아니었다. 나는 온 세상을 얻은 사자처럼 가슴이 웅장해지고, 평화로웠으며, 안도하였다,
지리산으로 향하는 내내 내 가슴에는 순치 황제의 시구가 계속 머물러 있었다.
"대장부 어디 간들 세끼 밥 못 먹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