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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이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by 나의신디

갱년기가 시작되며, 나의 과잉된 자의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 지 원인도 모른 채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가 반복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탐구는

나의 깊은 무의식과의 연결로 이어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000이다. "


어느 모임에서 내어준 주제로 글쓰기를 하던 중에

나는 내 안에 사는 원더풀 차일드를 만났다.


밝은 에너지로 친구들을 이끌고 마을 길을 뛰어다니며 놀던 9살의 나.

태어난 그대로, 존재의 에너지 그 자체로 살아가던 아이였다.


쾌활하게 웃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대체 어디로 간 거니?'

그러자 곧장 친구네 집 골방에 갇혀있는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보였다.

가난한 우리 집과 비교되던 부잣집 막내딸이던 은지네 집에 갇힌 나의 내면아이였다.

그 아이가 왜 거기 있는지,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내 안에는 사는 수많은 상처받은 아이들을 만났다.


놀라운 것은 만남이 곧 치유라는 점이다.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을 발견하고,

그 근원을 질문하면, 무의식 깊이 숨겨두었던 아픈 일들,

공감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나의 어린 시절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났다.


그 내면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창의성이 차단되고

결정장애를 일으키고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어떻게든 엄마와 아빠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다.

어떻게든 우리 집안을 일으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떻게든 내 동생들을 멋지게 키워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돕고 싶었다.


맞다, 모두 가망 없는 꿈들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내면아이들은 그 순간에 갖게 된 갈망에 사로잡혀 산다.

거기서 나아가는 법을 모른다.


현실에서는 육체가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도

그 사람은 그 내면아이인 그대로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산다.


엄마 아버지에 대한 나의 잘못된 사랑이

엄마의 엄마 노릇을 하려는 시건방진 딸,

자의식이 강한 딸로 나를 키웠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갈망은

가난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선택을 반복하게 하고

부의 축적을 위한 자연스러운 노력 대신

욕심스럽게만 보이게 하는 스쿠루지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동생들의 엄마가 되려던 나의 가당치 않은 설레발은

동생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고,

동생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나는 더 절망하고 분노했다.


나는 이렇게 자의식 과잉인 에고이스트가 되어 50년을 살았다.


나의 내면 아이들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헛된 꿈을 키우며

좌절을 반복하고

절망을 훈습하면서

분노를 키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이 내가 에고이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원인이었다.


에고이스트들을 변명하자는 것은 아니다.

에고이스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삶의 이유, 심리적 이유가 있음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 경험에서 깨우쳤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명이라 한다.

부정적인 에너지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존중하지 못한다.


강박으로 똘똘 뭉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헛똑똑이 짓을 하고

자기 세계관에 사로잡혀

자기 세계관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세계관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곧 무명이다.


나를 미워하며, 나를 존중하지 않는

내면아이인 채로 사는 무명의 삶은 고통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으니 타인을 존중할 수 없다.

나를 사랑할 줄 모르니 타인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대오각성하여, 드디어 나를 만나는 행운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무명 속에 사는 것도

무명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것도

모두 다 우리의 선택이다.


그 인연의 때가 언제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일찌감치 삶의 굴레를 박차고 나온 사람은

어려서부터 삶이 이끄는 대로 나를 내어 맡기고

창의적인 발상과 아이디어와 실행력과 하늘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삶을 일군다.


나처럼 뒤늦게 나를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통이 컸기에, 그 기쁨도 크다.


성공한 사람들처럼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물론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미워하고, 가족을 미워하며

허둥지둥 허겁지겁 삶을 살다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구분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그 판단 평가를 모두 내려놓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랬군요. 당신께 동의합니다.

그랬군요. 나에게 동의합니다.

동의하는 것뿐이다.


나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동생들의 엄마도 아니었고,

엄마의 엄마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 어깨에 짊어졌던 그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나니

실제로 어깨 위에 돌덩이처럼 딱딱했던 굳은살이 스르륵 풀리고,

두 사람의 몫을 해내기 위해 찌웠던 살도

자연스럽게 빠지며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게으르고 미루던 습성이 사라지고

일어나면 곧장 양치를 하고 일과를 시작하고,

생각지도 못한 행운의 찬스를 빨리 알아차리고

선택과 집중도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에 환희로움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능숙해졌다.

모두 다 내 내면아이의 선택들이다.


나는 이제 에고이스트로 사는 삶의 짐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아버지도, 엄마도, 동생들도, 이 세상을 사는 그 누구도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고 살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하늘을 보며 기뻐하고,

비 오는 오후에 신선한 빗줄기에 감탄한다.

길가에 핀 꽃들의 미소에 함께 웃고

오래된 고목나무가 나를 반기는 손짓에 호응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지금 여기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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