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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07. 2020

포기 포기하기

아예 안 하는 게 포기다. 때론 참 현명한 선택이다. 면밀히 조사하여 이해타산이 안 맞으면 미리 포기하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도 나왔다. 싸우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고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도 중요한 계략이라고. 무턱대고 대드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며 그럭저럭 무난하게 산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포기를 몰랐다.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기 위해 수 천 번을 포기하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스티브 잡스는 애플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은 포기하지 않은 어리석은(?) 이들 덕에 뜀뛰듯 발전했다. 


포기는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을 남들보다 더 살아온 이들은 많은 시도를 통해 포기의 장점을 봤을 것이다. 그때 포기했더라면 좋았을 일들을 떠올린다. 그들에겐 포기가 더 좋았던 것들이 더 많았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무모하게 덤볐던, 그랬다가 실패했던 것도 성공의 한 편이다. 그것 또한 무시할 순 없다.



못 오를 나무를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까? 못 오를 나무라도 쳐다보길 바란다. 나무는 못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무를 쳐다보니 나뭇잎이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나무는 오르기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못 오를 나무라도 쳐다볼 수 있다.



어른이랍시고 아이에게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조언하지 않는가? 땅만 보고 앞으로만 가라고 하지는 않는가? 사람 사는 것은 때론 하늘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날지는 못해도 하늘마저 못 볼 것은 없다. 시선은 하늘을 날 수 있고, 상상은 우주까지 이를 수 있다. 눈길마저, 상상마저 미리 포기하라는 건 좀 그렇다.


감나무 밑의 돼지는 어쩌다 떨어진 홍시 맛을 보고 행복해하지만 그 홍시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돼지는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의 뿌리는 봤고 기둥은 봤지만 홍시가 달린 줄기는 보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면 홍시를 봤을 것이고 기둥을 흔들어 홍시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겠지만, 평생 고개를 숙이고 땅만 팠던 돼지는 가까이 위에 있는 홍시를 보지 못한다. 


현시대에서 미리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은 좋아 보인다. 뻔한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포기는 현명하고 포기 못한 이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포기를 너무 자주 하지 말자. 세상은 포기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바꾼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바꿨다. 에디슨이 그렇고 라이트 형제가 그렇고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좀 더 산 선배로서 좀 덜 산 후배에게 조언이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포기는 아니었으면 한다. 선배의 실패를 타산지석 삼는 것도 좋다. 하지만 실패도 스스로 겪어야 한다.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쓴 경험이다. 나비가 힘겹게 허물을 벗고 나올 때 돕는 마음에 허물을 벌려주는 것은 결국 그 나비를 죽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각자 자기의 아픔이 있다. 도전으로 인한 실패도 있다. 얍삽하게 미리 포기하는 것을 미리 알 필요는 없다.


산을 옮길 수 있을까? 포기하지 않으면 옮길 수 있다. 우공이산이다. 문제는 높은 산이 아니라 포기하는 마음이다. 산을 옮기려거든, 포기를 포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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