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해
“삼촌, 해가 빨개요.”
네 살배기 조카 린은 창에 비친 석양을 보며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어? 정말 해가 빨가네!”
해거름 해가 붉은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린의 말마따나 석양을 보니 당연하지만 새삼스레 불그스름하다. 조카는 가끔 나를 일깨운다. 이미 알고 있는,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것들을 말이다.
엄마랑 밖에서 놀다 들어온 린은 싱글거리며 자랑했다.
“삼촌, 나 해 세 개나 봤다?”
무슨 소린가 하며 멀뚱 쳐다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조카는 신나게 떠들었다.
“집에서 하나 보고, 놀이터에서도 하나 보고, 슈퍼에 가면서도 또 하나 봤어.”
린은 해를 세 개나 본 것이 무척 신기한듯 앙증스레 고갯짓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른인 내게는 해가 하나지만, 아이인 조카에게는 해가 여러 개다.
사실 해는 하나다. 이 해는 태양계의 중심이며, 낮엔 지구를 비추고 밤엔 달을 비춘다. 서울 하늘에 뜬 해는 12시간 후에는 리오데자네이로 하늘에 뜬다. 이 해는 한 해다. 같은 해다.
한편, 같은 해가 때론 다른 해다. 아니 다른 해로 보인다. 아이는 해를 다르게 봤다. 아이의 눈에는 해가 여러 개다. 아이의 눈은 화수분이다. 꺼내도 꺼내도 해가 자꾸자꾸 나온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집 위에 뜬 해와 놀이터 위에 뜬 해와 슈퍼마켓 위에 뜬 해가 하나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한 해를 여러 개로 볼 수 있는지를.
해를 하나로 보는 것은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단순한 흑백 그림밖에 못 그린다. 하지만 해를 여러 개로 보는 것은 형형색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햇빛을 한 색이 아니다. 햇빛은 일곱 색, 아니 더 많은 색을 품고 있다. 햇빛의 색깔을 알고 싶으면 프리즘을 통해 빛을 비춰보면 알 수 있다. 햇빛은 일곱 색깔 무지개다. 무지개는 꿈이다. 해를 여러 개를 보는 아이는 그 눈이 프리즘이다. 꿈을 꿀 수 있다.
해를 하나로만 아는 어른은 꿈을 꾸지 않는다. 현실만 본다. 해는 태양계의 중심이며 낮에 지구를 비추는 그 해이며, 서울이나 리오데자네이로 하늘이나 같은 해다.
조카는 부자다. 해를 세 개나 가지고 있으니. 실은 더 많은 해를 가진 알부자다. 오늘 그중에 해 두 개를 내게 선물했다. 나도 이제 해 세 개다.
조카 눈은 화수분이니 얼마든지 해를 꺼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인심도 좋아서 선뜻 내게 해 두 개를 준 것이다. 오늘, 조카 덕에 내 눈에 무지개가 보인다. 꿈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