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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19. 2020

모두 죽였다. 그래야만 우린 거길 빠져나올 수 있었다.

누렁소

구제역 살처분 9-2조는 내일 06:30까지 시청에 오셔서 바로 버스에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소집명령이 내려졌다. 군대 영장처럼 마뜩잖은 소집에 맘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하나둘 모인 시청 직원들이 버스에 올랐다. 농장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임시로 설치한 컨테이너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양말, 팬티, 내복, 마스크, 보안경, 목장갑, 방한장갑, 방한화, 방한복으로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하얀 방제복을 입었다.


눈처럼 쌓인 생석회 길을 따라 농장으로 들어갔다. 그 농장엔 195마리의 한우가 있었다. 우리가 농장에 들어가니 대부분의 소들은 먹이를 주는 줄 알고 고개를 내밀었다. 축사 통로에 있는 사료와 건초를 소에게 주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몇몇 소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으로 아는지 우리를 심하게 경계하며 씩씩거렸다. 아랫동의 축사에는 어른소가 있었고, 윗동의 축사에는 어미소와 송아지가 있었다. 송아지 중에는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젖먹이도 있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에 놀란 송아지는 어미소 뒤에 숨어서 우리를 쳐다봤다. 난 그 송아지를 쳐다보지 못했다.


소를 묻을 구덩이 작업이 마무리되자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축사로 왔다. 우린 소를 몰았다. 축사 입구의 좁은 공간으로 예닐곱 마리의 소를 몰아넣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철문과 밧줄로 조였다. 수의사는 석시콜린(마취약) 주사를 소에 놨다. 1~2분이 지나자 소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5분이 못되어 주사 맞은 소들이 모두 쓰러졌다. 내 눈앞에서 쓰러진 소는 눈물을 흘렸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혀를 내민 채 가쁜 숨을 내쉬는 누렁소의 커다란 눈에서 아침이슬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누렁이는 덤프차에 실려 구덩이로 옮겨졌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누렁소, 사실 왜 죽여야만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 죽였다. 

어미소와 젖먹이 송아지도 죽였고, 그 농장에 있는 사슴도 다 죽였다. 발굽 갈라진 짐승을 다 죽여야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단 한 마리의 소라도 살려두고서는 우리는 그곳을 나올 수 없는 처지였다. 살처분을 마친 후 입었던 옷과 신발을 그곳에서 모두 불에 태우고 떠났다. 시내의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며 몸에 밴 냄새를 씻어냈지만, 현장의 기억은 씻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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