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렁이와 검둥이
지난해 봄에 시골의 큰형이 강아지 두 마리를 가져왔다. 그들은 전라도와 경기도의 사이가 얼마나 먼지 가늠하지 못한 채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집인 양 덤벙거렸다. 누렁이는 수컷이고 검둥이는 암컷인데, 남매는 짓궂게 물기도 하고 장난치며 곧잘 놀았다.
어느 날 둘은 죽을 둥 살 둥 싸웠다. 목덜미의 털을 꼿꼿이 세우고 으르렁거리며 맞선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록 강아지지만 야성적인 성깔이 드러났다. 서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눈빛을 번득이며 투그리다가 와락 엉겨 붙고 말았다.
처음엔 일상적인 장난으로 여겼는데 그들은 결코 재미 삼아 싸우는 게 아니었다. 피붙이의 끈끈한 띠앗도, 나의 엄한 윽박지름도 그들의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 침을 흘리며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그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겨우 떼어놓았다. 검둥이의 입가에는 피가 묻어있고 누렁이의 귀는 찢어졌다.
싸운 까닭은 뼈다귀 하나였다. 그렇게 띠앗머리 좋던 남매는 뼈다귀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개와 원숭이가 만난 양 싸웠던 것이었다. 싸우는 동안 그들은 더 이상 한 핏줄도 아니요 남매도 아니었다. 상대는 다만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적’이었다. 그들의 이런 유치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개는 우월감과 차별의식을 가지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역시 개는 어쩔 수 없는 개다’라고. 그럼 인간은 어떠한가? 인류의 역사를 싸움의 역사라고 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이 의리, 사상, 종교, 정의, 자유, 평화를 수호한다는 그럴듯한 허울로 일어났지만, 그 바탕은 결국 ‘밥그릇 싸움’ 임이 어김없다.
먹을거리는 기본적인 생존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한 꼴사나운 짓을, 무턱대고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안쓰러운 느꺼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삼일 굶어 도적질 안 할 사람 없다’라는 말처럼, 당장 죽게 될 상황에 맞닥뜨리면 도덕, 교양, 체면 따위를 거적문의 돌쩌귀처럼 거추장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그른 짓에 면죄부를 주자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들과 한 시대, 한 울안에 살면서 그들의 사정을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 발장’이 빵을 훔친 것과 ‘복녀’가 정조를 버린 것은 그들의 바탕이 원래 삐뚤어지고 되바라진 까닭은 아닐 게다.
먹을거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망석중이 다루듯 하는 것은 뻔뻔한 짓이지만 이 수단이 남을 부리기에 효과적이어서 적절히 사용하곤 한다. 조련사가 먹이로 개를 훈련시키고 북한이 식량으로 주민을 동여매듯.
개가 주인의 손에 있는 먹이를 얻기 위해서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든지, 아니면 주인에게 덤벼들든지 할 것이다. 내겐 두 가지의 우려가 있다. 하나는 개가 기다리다 지쳐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개가 기다리다 못해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백범의 세 가지 소원은 언제 이루어 질려나! 딴청 부림과 우쭐함을 버리고 안쓰럽고 애달픈 맘으로 민족의 역사적 숙제를 풀어야겠다. 안타깝다. 부끄럽다. 그리고…, 두렵다!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누렁이가 시름시름 앓았다. 며칠 그러다가 일어나겠지 생각했는데 도무지 나을 낌새가 없었다. 누렁이는 고꾸라진 채 밥 먹을 기운조차 없이 누워있었다. 부랴부랴 가축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약을 먹이고 주사도 맞혔지만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토요일 퇴근하는 무렵에 누렁이를 살펴보니, 죽은 양 꿈쩍도 않고 누워있었다. 그제까지만 해도 인기척이 있으면 버겁게 고개라도 들었었는데, 이젠 머리 들 기운조차 없나 보다. 두 손으로 몸뚱이를 받쳐 드니, 일주일 동안 굶어서 무척 야위었고, 다리와 고개는 문어 마냥 축 쳐졌다. 초롱하던 눈은 개개풀렸고 번들거리던 코는 거칠해졌고 야드르르한 털은 가스러진, 그야말로 산송장이었다. 눈앞에서 한 생명이 죽어가는데도 손을 쓰지 못하니 맘이 쓰라리었다. 차라리 나를 떠나도 좋으니 살기만 하라고 넋두리하며 목을 옭아 맨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눈곱 낀 누렁이의 쾡한 눈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병도 병이지만 기력이 딸려 죽을 것 같아 포도당 주사라도 놓은 요량으로 숙소로 들어갔다.
보이지가 않았다. 어제 눕혀놓았던 그 자리에 누렁이가 없었다. 순간, 누렁이가 다시 힘을 찾아 움직였구나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무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누렁이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누가 치우기 전에는 사라질 리가 없는데, 누렁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달포 후, 검둥이와 함께 동트기에 산책을 나갔다. 개꼬리 마냥 휘어진 논두렁을 따라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을 밟으며, 마치 이슬을 흠뻑 머금은 들풀처럼, 봄날의 싱그러운 기운에 젖어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폴딱거리는 검둥이는 나랑 나들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삐죽 튀어나온 코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거나 앞발로 흙을 파기도 했다.
사무실 아래의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검둥이는 길가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 날 오라고 몸짓했다. 난 뼈다귀가 있으려니 여기며 다가갔는데, 그곳에는 달포 전 모습 그대로 누렁이가 잠들어있었다. 삼월이라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스산하고, 그곳은 그늘진 곳이라 낮에도 날이 풀리지 않아 눈 외에는 부패되지 않고 깨끗한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낙엽을 걷고 땅을 파서 고이 묻어주었다.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죽기 전 안간힘을 다해 죽을 자리를 찾았던 누렁이를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경이로웠다. 죽을 때가 되면 제 무덤을 찾아간다는 코끼리의 얘기는 들었지만 개의 경우는 듣지 못했다. 자기의 추한 주검을 주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결벽증인지,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마지막 눈을 감는 것이 개의 본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의 죽을 때를 알고 죽을 자리를 찾은 개를 보며 곰곰 생각했다.
인생은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러시안룰렛’이다.
태양이 지구를 돌 듯 회전식 연발 권총의 실린더가 시나브로 돌고, 태양이 함지(咸池)에 빠지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진다. 다행히 죽지 않았다면 다음날 태양이 부상(扶桑)에서 부상(浮上)할 때 노리쇠는 다시 뒤로 당겨지고 실린더는 한 칸 돌며 새로운 사격을 대기한다.
단 하나의 총알이 실린더의 어느 구멍에 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사람의 평균수명을 60세라고 가정하면 확률은 대략 1/22,000이다. 죽음의 때가 어떤 이는 빠르고 어떤 이는 더디기도 하겠지만, 실린더가 한 칸씩 돌 때마다 죽을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매일 죽을 각오로 삶을 맞이하는 사람은 결코 생을 가벼이 여기지도, 가이없이 여기기도, 부담스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개가 먹이통의 바닥을 샅샅이 핥듯 삶을 알뜰살뜰하게 꾸려나갈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뻐기다가 갑자기 닥친 죽음을 앞두고 허둥지둥하기보다는 겸허한 맘으로 오늘을 허락하신 신께 감사하며 하루를 맞이한다면, 내일 아니 당장 오늘 죽더라도 차분하게 삶을 끝막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에 ‘단지’ 하루가 아니라, 평생에 한 번밖에 없는 ‘오직’ 하루이다. 내 삶에 있어 2000년 7월 17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오늘’에만 있는 날이다.
대학교수와 유치원생이, 꺽다리와 앉은뱅이가 서로 만나서 얘기를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대꾸를 해야 할까?
감자탕이나 뼈다귀 해장국을 먹으면 아줌마에게 남은 뼈다귀를 싸 달라고 해서 검둥이에게 주는데, 나도 솔찬히 뼈다귀 해장국을 좋아하지만 검둥이는 허천나게 좋아한다. 검둥이에게 뼈다귀를 하나 주면 날름 받아먹고 다시 입맛을 다시며 날 쳐다보지만, 한꺼번에 왕창 주면 먹다 남은 뼈다귀는 땅을 파서 묻어놓고 다음에 캐 먹곤 했다.
여름이 다가오면 더위를 식히고자 빙과를 자주 사 먹는데, 검둥이는 날 빤히 쳐다보며 군침을 흘린다. 가끔은 내 눈길을 끄느라 컹컹거리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검둥이는 내가 먹는 거라면 뭐든지 얻어먹으려 하는데, 심지어는 껌도 받아먹다가 아무리 씹어도 계속 그 모양이라 도로 뱉어내었다. 유희적 인간은 심심풀이로 놀이와 기호음식을 만들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는 인간들의 모습이 개의 눈에는 한심하게 보일런지도 모른다.
젖먹이가 보채듯 낑낑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검둥이에게 절반 남은 빙과를 주었다. 개는 빙과를 혀로 날름 핥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집 옆에 땅을 팠다.
아뿔싸!
검둥이는 뼈다귀를 묻듯이 빙과를 구덩이에 넣더니 흙을 덮고 앞발로 톡톡 다지는 게 아닌가. 뿌듯한 듯 날 쳐다보는 검둥이를 보며, 난 ‘그게 아닌데’를 연신 중얼거리며 어찌할 바 몰라했다. 그러나 검둥이에게 빙과가 녹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으니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빙과가 너무 맛있어서 두고두고 아껴먹을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지금은 배가 부르기 때문에 다음에 먹을 요량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나는 부자연스럽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 검둥이는 그 빙과가 생각나는지 묻었던 곳을 팠다.
달랑 막대기만 남은 빙과를 보고 의아해하던 검둥이의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깔깔거리는 날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꼬리를 치더니, 다시 사방을 더듬거리며 아득바득 땅을 후볐다. 그런 검둥이의 몸짓이 무척 우스꽝스러웠으나 비웃기엔 그의 발버둥이 너무나 진지했다.
개와 말을 할 수 있다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련만, 내가 개가 아니고 개 또한 사람이 아니니 바이 어찌하랴! 차라리 개가 되어 컹컹 짖고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만약에 눈높이가 달라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학교수는 아이들의 말투로 유치원생과 말해야 할 것이며, 꺽다리는 앉음새로 앉은뱅이와 눈을 맞춰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대학 강의를 이해할 수 없고, 앉은뱅이는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는 할 수 없는데 나는 할 수 있다면, 비록 내게 고달픔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낮아지는 모습이 바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