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나무
저녁식사 마치고 강의동을 휘감은 에움길을 지나 약수터 뒤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바투 한사람 지나갈 정도의 호젓한 숲길을 풀잎 헤치며 걸었다. 거미줄이 낯에 달라붙기도 하고 각다귀들이 눈 앞에서 아물거리기도 하지만, 일단 숲길에 접어들면 나무들이 뿜어대는 알싸한 기운에 맘이 상쾌해진다.
길기만 한 오뉴월 해는 아직 서켠에서 잔열을 뿜어대며 미적거리지만, 짙은 나뭇잎은 그 푸른 장막으로 열기를 막아주고 또한 잎사귀의 수많은 기공에서는 수분을 내뿜어 데워진 공기를 식혀 준다. 달포 전에 이 길을 걷다가 물기 가득 머금은 찔레의 어린순을 먹었는데, 시방 그 찔레는 배꽃처럼 하얀 꽃을 피워 방실거린다.
작은 도랑을 건널 수 있도록 걸쳐놓은 외나무다리가 있다. 다리를 조금 못 미친 곳에는 미치광이바람이 심하게 일었던 그러께 여름에 뿌리를 드러내며 쓰러진 아까시나무가 비스듬히 누워있다. 난 그 나무가 그렇게 그만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까시나무는 드러누운 채 몸통에서 싹을 틔우며 꿋꿋한 삶의 의지를 보였다. 옆으로 누운 아름드리 몸통에서 위로 곧추 자라는 가지런한 새순들은 풀머리를 가다듬는 빗살 같다.
아까시나무(영어: black locust)는 콩아과(Faboid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부르는데, 아카시아는 미모사아과(Mimosoideae)의 아카시아속에 속하는 식물의 속명이다. 미국 남동부가 원산지이며, 북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의 온화한 지역에 분포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침입 종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여긴다.
<위키백과 참조>
조심스레 나무다리를 건너고 돌길을 헉헉대며 올라 산허리를 에둘린 산책로에 다다랐다. 산새들은 낯선 나 따윈 아랑곳없이 제 노래를 부르지만, 난 행여 그들의 일상에 방해가 될까봐 싸목싸목 발걸음을 옮기며 걷었다. 구김살 없는 나의 상념, 일상에서는 사람이나 전화나 일 등이 가치작거려 깊은 상념에 젖어들기 어렵지만 숲의 품에 안기니 돌이끼 잔뜩 낀 두레우물 속에 머문 양 그윽했다. 굳이 심호흡을 하지 않아도 폐가 부푼 느낌이다.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도 귀에 익숙해져서 상념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가에서 풀을 뜯던 산토끼 한 마리가 뚱그런 눈으로 날 살피고, 난 뜨음했던 토끼를 만난 것이 들떠서 옴짝달싹 않고 멈추었다. 그와 난 서로 눈길을 떼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처음엔 우연히 눈길이 마주쳤지만,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때를 놓치는 바람에 서로 눈치를 살피며 쳐다보고 있었다. 토끼는 경계의 눈빛으로, 나는 신비의 눈빛으로.
그 사이에 끼어들어 긴장을 깨뜨린 것은 푸드득거리며 날아간 산비둘기였다. 토끼는 그것을 핑계 삼아 소스라치듯 달아나 버렸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야생동물을 만난 기분은 꼬마가 애지중지하던 놀잇감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이다.
조팝나무, 노간주나무, 자귀나무 그리고 떡갈나무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하며 나무다리를 건너고, 모기들이 우글대는 질퍽한 새밭을 지났다. 가파른 돌무지를 헉헉거리며 오르니 산 중턱에 고즈넉이 서있는 단아한 팔각정이 쉬어가라 손짓한다. 정자에 앉으니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간들바람이 닦아준다. 달콤한 아까시꽃 향기는 너무 진하여 취할 것만 같다. 작은 방이 아니라 넓은 숲을 온통 향기로 채우는 아까시나무는 참 대단하다.
정자 아래로 펼쳐진 솔숲, 강의동, 잔디 깔린 대운동장, 청둥오리 무자맥질하는 비룡호, 날아오르는 독수리 형상의 상징탑 등등이 옹기종기 다붓하다. 듬성듬성 다복이 모여 있는 아까시나무는 엎어 놓은 밥공기인 양 새하얗다. 보릿고개를 격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나무를 보며 마음으로나마 고봉밥을 실컷 먹으며 위안을 삼고, 잎으로 풀피리를 불며 기분을 달랬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탐스런 꽃잎을 한 움큼 씹으며 달콤한 꿀맛에 싱글벙글 하였으리라. 아까시 꽃은 소박하고 향기도 좋으며 뿌리는 뿌리혹박테리아를 이용하여 공중질소를 고정하므로 흙을 거름지게하고 줄기는 요긴한 땔감이 되었다. 또한 몸통은 매우 단단하여 철로의 침목이나 선박의 구조물로도 유용하게 쓰였다.
사실, 난 아까시나무가 달갑지 않다. 뿐만 아니라 매우 고깝게 여긴다. 해마다 잘라내어도 다시 움을 틔우는 그 억척스러움에 진저리가 난다. 제 나름의 사는 방식이겠지만 그것이 다른 나무를 해하며 자기만의 영역만 확보하는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이다. 조경수를 관리하는 나로서는 아까시는 귀찮고 해로운 존재이므로 베어내야 할 잡목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숲에 아까시나무가 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현상이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이 늙어서 노인이 되듯이, 맨땅에 푸새가 자라 푸서리가 되고 푸서리에 나무가 자라 수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이의 극상은 소나무 같은 양수림이 아니라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떡갈나무나 번식력이 우수한 아까시나무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인데 나는 왜 소나무는 좋은 나무, 아까시는 나쁜 나무라는 비뚤어진 주관에 따라 숲을 바라보고 있는가!
산이 황폐할 땐 마뜩이 여겨 아까시를 심었다가 산이 울창하니 마뜩찮게 여겨 베어내는 억지 심보다. 아까시 신세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사냥개 신세와 다를 바 없구나. 이런 편견을 갖고 숲을 대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 자연을 올바로 보는 시각이 한참 부족하다. 대체 이런 연유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인간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탓이리라.
인간 사회에서는 어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이 나와, 내가 소속되어있는 단체의 뜻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지지하거나 거부한다. 사회를 볼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색안경을 낄지라도 숲을 볼 때는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자연현상들이 인간이 보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인위적인 간섭은 옳지 않다.
자연은 생물이다. 나무가 서서 잔다 하여 자빠뜨리랴! 인간의 판단기준에 자연을 꿰어 맞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때론 ‘자연보호’라는 허울로 자행되는 폐해가 얼마나 큰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연을 통해 생활의 지식을 얻고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정신없이 오가는 괘종시계의 추처럼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가끔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함초롬한 들풀과 눈맞춤도 하고 살포시 어루만지고 싶다. 애기빈대, 며느리배꼽, 소리쟁이, 각시붓꽃, 범부채, 바늘엉겅퀴, 지칭개, 도깨비바늘 등등 이네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싶다.
산을 오르는 것은 나무와 숲을 모두 보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동안에는 가직이 길섶에 있는 나무를 볼 수 있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눈 아래 멀찍이 숲을 볼 수 있다. 산기슭에서 나무만 보는 사람은 아까시를 자빠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고, 산봉우리에서 숲을 보는 사람은 아까시도 숲의 일부로서 보듬을 것이다.
숲은 메아리다. 내가 ‘아’ 하고 부르면 숲도 ‘아’ 라며 답하고, 내가 ‘어’ 하고 부르면 숲도 ‘어’ 라며 답한다.
“푸른 숲아! 나는 네가 좋아.”
숲이 메아리친다.
“숲바라기! 나도 네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