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뜨기 Jul 25. 2020

긴 잠 후

장장 15시간을 잤다.

긴 잠 후 주변을 둘러봤다. 늦게라도 싹틀 줄 알았던 창고 옆의 느티나무는 끝내 잎을 내지 못한 채 칙칙한 줄기로 우두커니 서있다. 지난 가을에 유난히 많은 꽃을 피웠던 대운동장 어귀의 튤립나무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다. 줄줄이 서있는 푸른빛의 뭇 가로수 틈바구니에서, 홀로 잿빛을 띈 채 잠에서 깨지 못하는 튤립나무는 지난해의 그 흐드러진 꽃 잔치가 단말마였나 보다.


봄은 족집게처럼 죽음을 고른다. 겨우내 죽은 양 움츠린 나무둥치에서 끓는 솥의 바닥에서 물방울이 보글대듯 움트는 이때, 몇몇 나무는 아무런 기미가 없다. 겨울엔 어떤 나무가 자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온누리에 푸른빛이 감도는 오월에는 그 죽음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러께 인도의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투수콘을 깔던 작업을 할 때 인부들은 아름드리 튤립나무의 팔뚝만 한 뿌리를 도끼로 잘라냈다. 잘린 뿌리 쪽의 줄기에선 싹이 나지 않았고 나머지 가지로만 온 나무를 감당했다. 그게 무리였는지 점점 잎을 적게 내던 튤립나무는 영영 죽고 말았다. 작년의 그 많은 꽃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효시(嚆矢)였구나.


설 즈음부터 상태가 심해진 큰아버지는 여든셋의 인생을 갈무리하시고 깨지 못할 잠에 드셨다. 장지에서 돌아와 큰집을 나서는데 큰집의 사촌형님이 말했다.

“자주 놀러 오너라. 근데 이젠 큰집에 와도 큰아버지는 볼 수가 없다. 알지?” 

알고 있지만 다시 볼 수 없다는 그 말이 쐐기처럼 가슴에 박혔다.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이틀간의 밤샘으로 녹초가 된 나는 집에 들어와 통나무처럼 쓰러져 15시간의 긴 잠을 잤다. 아무리 오래 잠들어도 죽지 않았다면 다시 깨어난다. 살아있다면,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눈을 뜬다.  떠야 한다. 죽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다면 눈을 뜬다.

긴 잠 후, 다시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새롭고 반가웠다.

작가의 이전글 암탉의 내리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