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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뜨기 Jul 23. 2020

암탉의 내리사랑

어머니

사무실 옆의 빈터에 철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닭장을 만들었다. 여남은 마리의 병아리를 들여다가 키웠는데 그루터기의 움처럼 부쩍부쩍 자랐다. 산자락의 조팝나무가 찹쌀가루를 버무리듯 소박한 꽃을 피우고, 이어서 찔레꽃도 튀밥 터지듯 함함한 꽃을 필 즈음에 암탉은 하나 둘 알을 낳더니 이윽고 품었다. 


개와 달리 닭은 좀체 길들여지지 않아 낯익은 내가 다가가도 멀찌감치 달아나는데,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은 가까이 다가가도, 심지어 만지려고 손을 내밀어도 꼼짝달싹 않고 알을 품었다. 나는 품고 있는 알을 헬 요량으로 암탉의 몸뚱이를 밀쳤는데, 무슨 배짱인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더니 감히 내 손등을 쪼기까지 했다. 만약 내가 해코지할 맘이 있었다면 식은 죽 먹듯이 닭의 모가지를 움켜쥘 수도 있는데 말이다. 


3주 동안 알을 품는 암탉의 꼬락서니는 후줄근하여 보기에 무척 안쓰러웠다. 보름 가량 지난 후 알을 살피려고 암탉을 밀치다가 깜짝 놀랐다. 닭의 배 밑 깃털이 하나도 없어 통닭집에 진열된 닭처럼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처음엔 병에 걸려서 그런 줄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닭은 제 몸의 온기로 알을 까기 위해 스스로 깃털을 뽑아 맨살을 드러낸 것 같다. 깃털은 둥지에 쌓여 미미한 열이라도 빼앗기지 않도록 보온재로 사용하는 것 같다. 애면글면한 그 깜냥을 단지 본능적인 행동뿐이라고 하기엔 그 표현이 너무 가볍다.


부화할 날이 가까워지자 흥분이 되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는 모습은 한번도 보지 못했기에 사뭇 기대가 되었다. 잔금이 간 알을 귀에 대어보니 그 안에서 삐악 거리는 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아랫배에 귀를 대고 태중의 아이가 발길질하는 것을 들으며 신기해하는 남편처럼 나는 설렘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경이롭던지! 닭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병아리의 부화를 지켜봤다. 



알 안에 있는 병아리는 안에서 껍데기를 쪼아 겨우 부리가 나올 정도의 구멍을 뚫고, 개나리 꽃봉오리처럼 앙증맞은 부리만 밖으로 삐쭉 내놓고 가는 숨을 깔딱거렸다. 껍데기에 금이 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병아리는 껍데기를 완전히 벗을 수 있었는데, 갓 깨어난 햇병아리는 외계인 ET처럼 배불뚝이 꼴이었다. 양분을 축적한 주머니인 듯싶다.


새들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보는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여기며 졸졸 따라다니는데, 이것을 ‘각인’이라고 한다. 병아리에게 나를 각인시키려고 한참을 지켜봤다. 알들은 한꺼번에 깨는 것이 아니라 꽤 뜸을 들이며 부화하고, 갓 깬 햇병아리는 며칠이 지나야 눈어림할 시력이 생기는데 그렇게까지 버틸 진득함이 없어 포기했다. 사나흘 후 암탉의 꽁무니를 아장아장 따라다니며 모이를 쪼아대는 예닐곱 마리의 병아리들을 볼 수 있었다.


하릅강아지인 검둥이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데, 어느 날 모이를 주는 나를 따라서 촐랑촐랑 닭장 안까지 얼떨결에 들어왔다. 

검둥이는 늑대처럼 닭장을 헤집으며 설쳐대고, 닭들은 푸드덕거리며 허겁지겁 달아났다. 닭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이미 두어 마리의 닭들이 검둥이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려 질질 피를 흘리며 펄떡거린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이 되어야 자연스러운데 눈앞의 상황은 엉뚱하게 펼쳐졌다.


검둥이가 닭장 안으로 들어오자 놀란 닭들은 여기저기로 숨느라 정신이 없고 병아리들은 암탉의 품으로 모이는데, 암탉은 쇠구슬 같은 눈을 똥그랗게 부릅뜨고 목의 깃털을 바짝 세우더니 검둥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쪼아댔다. 암탉의 목숨을 내건 악다구니에 혼쭐나게 당한 검둥이는 꼬리에 불붙은 양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허둥대는 검둥이의 꼬락서니를 보노라니 어이가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은 강아지가 아직 어려서 호랑이의 우악스러운 배내성깔을 모르는 탓이지만, 암탉은 개가 몸서리칠 대상이라는 것을 뻔히 알 텐데 어떻게 저런 골 빈 대거리를 할 수 있을까? 암탉의 안중에는 자신의 목숨 따윈 아랑곳없고 애오라지 병아리에 대한 내리사랑만 가득하구나.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골 빈 내리사랑’이라고 역설(逆說)하며 역설(力說)한다.


해포 전, 어느 빌딩에 불이 났었는데 어머니와 아들이 119 구급대에 의해 구출되는 과정에서, 자식을 구출하는 데에 자신이 걸림돌이 될까 봐 어머니는 그 높은 곳에서 스스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어머니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모자가 부둥켜안고 눈물범벅을 이룬 모습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에 빠지면 물불도 가리지 않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서슴없이 하는구나!


사랑도 중독일까?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면에서는 마약과 같으나, 마약은 자신과 이웃을 무너뜨리지만 사랑은 자신과 이웃을 구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것도 기꺼이 포기하는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일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도 마뜩이 버리는 암탉, 우렁이와 염라대왕거미, 그리고 어머니.



*****

어머니, 별을 보며 당신의 그지없는 참사랑을 떠올립니다. 

정미년 큰 가뭄으로 벼가 다 말라비틀어지자 아버지는 서울로 돈 벌러 올라가셨고, 당신은 날 밴 몸으로 방죽 공사장에서 흙을 나르셨죠. 지금의 내 나이인 서른 살에 그 생활이 퍽 고달팠을 텐데 당신은 날 곱게 낳으시고 기르셨습니다. 


내가 예닐곱 살 때, 심한 독감에 걸려 여남은 날 코피를 쏟는 날 돌보시며 당신은 내가 쏟은 코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초등학생 때, 십리 길 학교에서 몸이 꽁꽁 얼어 돌아오면 내 곱은 손을 꼭 쥐시고 당신의 볼에 대셨죠. 그 따스한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가슴이 데워집니다. 고등학교 입학하던 날, 자식을 멀리 보내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 이불을 이고 그 먼 곳까지 따라오셨죠. 삭막한 기숙사에 자식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시던 뒷모습을 생각하니 느꺼움이 북받칩니다. 입대하던 날, 대문간에서 흔들던 당신의 손이 눈가로 옮겨갈 때 나는 돌아서서 부러 씩씩하게 걸었죠. 첫째 둘째 아들을 군에 보내고 또다시 셋째를 군에 보내며 속울음을 참으시던 당신은, 내가 입었던 옷이 집으로 배달되던 날 다락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다는 것을 동생에게 들었습니다.


어쩌다 못난 자식이 집에 간다는 말에 아까워서 사 먹지도 못하던 과일을 사놓고 자식을 기다렸죠.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하면 행여나 올까 하여 남겼다가 상해버림은, 과일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애틋한 미련이겠지요. 새벽에 길에서 쓰러져 응급실에서 깨어나자마자, 오히려 이 자식의 아침 거른 것을 염려하시던 밉도록 부담스러운 사랑. 독학에 의한 학사학위를 취득하던 날,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농학과 수석으로 우수상을 받으며 사진기의 섬광을 받아도 그저 덤덤했는데, 대학교를 보내지 못해 못내 미안해하시던 당신이 너무도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기꺼웠습니다.


밤하늘의 별모래를 세기엔 밤이 너무 짧기에 닭울녘을 아쉬워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갚기엔 철든 삶이 너무도 짧기에 풍수지탄(風樹之嘆)합니다. 당신은 이미 황혼을 바라보는데, 전 아직도 어리기만 합니다.

별이 아득히 멀 듯 당신도 다가가기엔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안갚음 하기엔 말입니다. 당신의 도타운 사랑을 갚겠다는 자체가 별을 따겠다는 생각처럼 불가능한 깜냥 인지도 모릅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처럼, 당신은 노파심 어린 눈길로 개밥바라기처럼 날 살피지만, 난 눈짓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

어머니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짝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이 눈에 밟혀 한시도 잊지 못하지만 자식은 시계추처럼 싸다니다가 뜸하면 어머니를 떠올린다. 하늘의 붙박이별은 언제나 밤바다에 떠서 그 잔잔한 빛을 땅에 비추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하늘을 잊은 채 허둥지둥 헤맨다. 삶에 지쳐 직수굿이 고개를 숙이다가 긴 한숨 쉬며 올려다본 밤하늘, 무수한 별무리가 자기를 향해 다투듯 쏟아지는 모양을 보며 ‘아, 저기 저렇게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구나, 형용할 수 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별들이.’ 새삼스런 감상과 그리움이 인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기까지 가장 가까이 지낸 이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뱃속에 280일 동안 아이를 품었다가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자식을 낳는다. 젖먹이는 귀 익은 심장소리를 들으며 젖을 빨고,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자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세상살이를 익히며 시나브로 자란다.


어머니는 자식의 몸을 씻겨주고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고 변을 치워주고 병을 간호하고 맘을 편케 하고 삶을 준비시킨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보살핌이 필요한 때는 갓난아이 시절이다. 에두른 환경에 대해 숫제 무방비상태라서 어느 때보다도 어머니의 돌봄과 바라지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사람은 네 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몇 곱절 많았다는 것을 곱새겨야 한다.


밤하늘에 수정별이 하나 둘 박히기 시작하고, 삥긋 웃으며 떠오른 달은 잣나무 꼭지에 걸터앉아 온누리를 비춘다.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동네 저수지 위에도 저 달이 떠있겠지. 오늘 밤 어머니께 전화를 해야겠다. 전선을 타고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어머니의 춤 "도라지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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