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주방장이 식칼 다루듯 의장대원들은 소총을 부리며 의장행사 동작을 연습 중인데 막사 앞뜰 한쪽에 여남은 명의 대원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뭘까 궁금하여 다가가 보니 꽃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든 꽃뱀은 난데없이 나타난 대원들에게 에둘린 채 연신 갈라진 혀만 날름거릴 뿐이다. 막상 뱀을 둘러싼 대원들은 미적거릴 뿐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꽃뱀은 독사는 아니지만 뱀 자체가 주는 무서움과 혐오감 때문이리라.
난 한 대원에게서 M-16 소총을 건네받아 개머리판으로 뱀의 목덜미를 누르고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뱀의 대갈통을 집어 들었다. 몸을 약간 꾸무럭거릴 뿐 별 움직임이 없었다. 그제야 대원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신기한 듯 뱀을 구경했다. 1.8리터 페트병에 꽃뱀을 집어넣고 그들에게 넘긴 후 작업을 나갔다.
내 어릴 적 시골에서는 뱀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소 깔 베러 논두렁을 걷다가, 땔감 구하려 오솔길을 걷다가, 우렁이 잡으러 웅덩이에 갔다가 뱀을 만나면 작대기로 두들겨 패서 칭칭 감아 의기양양하게 가지고 왔었다. 또래의 악동들은 잔가지로 툭툭 치며 장난치고 어떤 이는 서슴없이 허물을 벗기기도 했었다. 어른들이 보면 술 담근다고 가져가거나 숯불에 구워 술안주로 먹기도 했었다.
그 당시엔 개구리를 통째로 꾸역꾸역 삼키는 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구리도, 또한 그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도 구경하기가 만만찮다. 헝클어진 반송의 나무 꼴을 다듬으며 그 뱀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며 물어보니 다시 숲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대원들이 선해서 뱀을 풀어주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게다. 개구리와 뱀을 스스럼없이 잡아 죽이던 어릴 적의 나와 내 또래들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어린 시절에는 정부에 환경부가 없었고 대학에 환경학과도 없었다. 병이 생기니 병원이 생기듯 환경에 문제가 생기니 환경과 관련한 단체, 사업, 정책이 생겨났다.
나와 내 또래의 꼬맹이들은 과연 환경 파괴자일까? 우리들에게는 환경 자체가 환경이었다. 환경이란 말 그대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배경인데, 우리는 환경의 일부로서 개구리를 잡았고 뱀도 잡았다. 그것이 생태계를 흩트리거나 먹이사슬을 끊어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쉬를 한다고 해서 저수지가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하지만 욕조에서 목욕하다가 쉬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목욕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척 부자연스러운 어깃장이다.
대원들이 뱀을 놓아준 것은 자연에 대한, 환경에 대한 어떤 위기와 필요의 기운을 느낀 탓이리라. 늦게나마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생각은, 그것이 비록 혐오스럽고 사나운 파충류나 맹수라 할지라도 매우 소중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뱀도 참 불쌍하다. 인간과 뱀은 원죄의 신화 때문인지 인간과 앙숙이지만 지금 우리는 뱀에게도 측은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게 되었다. 제 딴은 개구리를 영원한 자기네들의 양식이라고 여겼을 텐데, 이제는 오히려 잡아먹히는 꼴이 되었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덤비는 황소개구리를 보고 슬금슬금 피해야만 하는 뱀의 신세, 알쏭달쏭하지만 인간이 개구리로부터 뱀을 보호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낯익음과 낯섦. 두려움은 낯섦에서 온다. 오늘의 우람한 의장대원들은 뱀이 낯설어 두려웠고, 어제의 쪼끄만 우리들은 뱀이 낯익어 만만했다. 야생동물이 예전처럼 흔해서 낯익었으면 좋겠다. 개구리와 뱀을 함부로 죽여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이단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