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마귀
밤하늘의 견우와 직녀는 잔별 무리가 넘실거리는 넓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다가 해마다 한번 만난다.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에 흐르는 미리내에 수많은 까막까치들이 날아와 오작교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까막까치’는 까마귀와 까치를 이르는 말인데, 까마귀와 까치는 둘 다 같은 참새목(目), 까마귀과(科)에 속하는 새 무리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영 딴판이다. 까마귀는 흉조, 까치는 길조로 여겨진다. 예로부터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며 불길하게 생각했고, 까치 소리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며 좋게 생각했다.
1964년에 까치를 나라 새로 지정했고, 1966년에는 산림청 조수보호위원회가 까치를 수렵 조류에서 제외시켜 까치는 보호받는 새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충북도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는 까치를 수렵허가 조류로 편입시켰다.
천덕꾸러기, 까치는 영락없는 천덕꾸러기다. 과일을 마구 헤집어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가 하면 전봇대에 집을 지어 정전을 일으키기도 한다. 까치와의 한판 전쟁을 선언했지만, 그 영특함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판이다.
아침마다 까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반가운 손님은커녕 오히려 쇳소리 같은 소음에 신경이 거슬려 하루의 시작이 영 찜찜하다. 끼리끼리 다툼을 하는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는 꼬락서니를, 보기 싫어도 억지로 보면서 아침을 맞는 것은 고까운 일이다. 길조라는 이유만으로 눈감아 주기엔 그네들의 짓거리가 너무 눈꼴사납다.
차라리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까마귀가 그립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떼 지어 우글거리는 까마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이젠 그네들의 모습이 기억에 가물거린다. 들녘의 청소부, 반포지효(反哺之孝), 효의 상징인 까마귀들은 사람들의 따돌림과 무자비한 포획으로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지겨운 까치 대신 드문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열고 싶다. 어떻게 보면 흑진주처럼 새까맣고 반지르르한 까마귀의 깃털은 그 어느 새보다 곱고 곱다.
막연한 이유로 어떤 생물종을 지나치게 보호하거나, 또는 씨를 말리는 부자연스러운 짓거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동그란 시계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어 분침과 시침이 정확히 돌고, 둥그런 지구는 갖가지 생명체가 함께 어울리어 식물과 동물이 더불어 산다. 올망졸망 들쭉날쭉 자연스러움이 좋다. 어쩌면 제멋대로가 가장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지도 모른다. 억지로 틀에 맞춘 균형 속엔 종잡을 수 없는 혼란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