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넷식 사연팔이와 '자기 이야기' 사이의 경계
네 번째 강의에는 <계간홀로> 이진송 편집장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그냥 응가처럼 싸버리세요. 일단 싸면 매만질 게 생겨요."
우리에게 웃음과 희망과 용기를 주신 차녀힙합의 대가 이진송 편집장님의 강연을 함께 만나보시지요.
* 본 포스트는 강연 내용을 기획팀이 재구성한 것입니다. 중간중간 삽입된 이미지는 이진송 작가님이 준비해오신 PPT이미지를 활용한 것이에요.
에세이가 뭘까요? 여러분도 이 수업을 듣기 전에 에세이의 정의가 뭘까 해서 저처럼 초록창에 써보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국어사전이 설명하기를,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 체험을 설명하는 산문형식의 글이다 라고 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객관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있다 라고 적혀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수필이라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 학교 안의 청소년들이라 하면 피할 수 없는 피 아저씨가 있죠? 이 아저씨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에세이스트이자 수필가인데, 이 분이 수필에 대해 뭐라고 썼냐 하니...“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여러분 언어영역 시간의 고통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자 여기서 짜증이 나기 시작하죠?
저에게 이런 표정과 이런 감정들을 불러 일으킵니다(짤방).
가서 주무세요.
좋은 글, 나쁜 글, 이상한 글. 세상에는 보통 이 세 가지의 글로 나뉜다고 하죠.
어떤 게 좋은 글이고 무엇이 나쁜글이라고 여겨지고 무엇이 이상한 글인가. 이상하다는 건 뭐죠? 무언가 낯설고 정상적인 규범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 익숙하지 않은 것. 기존의 감각이나 이미지나 관습과 다른 어떤 것을 봤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전례가 없다고 하죠. 그러면 왜 그런 건 전례가 없었을까? 없었던게 아니라 사실은 지워지거나 삭제된 것이 아닐까? 이 좋은 것들에 해당하는 글만 살아남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나쁘거나 이상한 글을 썼다고 평가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쁘고 이상하다고만 여겨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건 논문에서 발췌한 글인데요, 여성들이 몸의 존재와 결부된다는 것은 이 자리 모이신 분들은 알고 계실 거예요.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여성의 특징이 열등한 것으로 규정지어 지는 거예요. 말하자면 선후관계가 바뀌는 거죠.
제가 1920년대 나도향 소설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요. 1920년대 나도향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이 너무 우는 거예요. 너무 질질 짜는거예요. 그래서 저는 읽으면서 아니 얘는 왜이렇게 툭하면 울지? 누님이 뭐라고 하면 울고 뛰쳐나가고 이래요. 보통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거를 예술가의 연약한 감성과 독특한 감수성으로 해석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1920년대의 여성 혐오와 무엇이 감정적인 것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짓는가 이 얘기를 하면서 “자 보시오. 남성이 많이 울면 그것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성이고 독특한 섬세한 세계에 대한 인지로 받아들여지는데 여자가 많이 울면 이것은 열등하고 비이성적인 것의 증명으로 통하지 않느냐” 는 내용의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에세이라고 하면 도서 마케팅 분야에서 소녀감성, 여성들의 취향을 저격 이런 말을 많이들 하죠. 그러나 제가 말하는 여성적인 이란 기존의 체제와 다른, 반하는, 이전의 것들과 다른 것을 포괄하는 임의적인 표지라고 생각을 하시면 돼요. 가부장제에서는 정상적인 남성성 이외의 것은 모두 묶여서 ‘아닌 거’로 구별이 되잖아요. 아까 말했듯 1920년대의 남성 인물은 여성화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죠. 그 사람들은 '여성화' 되지 않아요. 그건 예술가의 표시이기 때문에. 그러나 남성성을 훼손하는 모든 것들은 여성화 되고 멸시되죠.
정상성 바깥에 있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여성적인'이라는 라벨링을 붙일 때 중요한 거는 우열의 기준을 갈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적인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지금까지외는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래서 제가 글감의 기준을 허물어버리자 이런 얘기를 한 건데, 1960년대에 소위말하는 여류 소설가들이 대거 등장을 했을 때 남성 작가들이 굉장히 비웃어요. 술 담배 맛도 모르면서 무슨 소설을 쓰시오. 라고 빈정거리죠. 여자 작가들이 쓴 글들은 대부분 여류문학, 연애소설이라고 비하를 하죠. 거기에 대응하는 여성작가들이 했던 말 중에는 “미역국 맛도 모르면서 무슨 소설을 쓰시오” 라는 말이 있었어요. 술, 담배가 예술의 특권이고 자유로운 영감 분출의 도구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미역국은 낯설고 특이하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그런 것들이 그 당시 '여류작가'로 폄하당하던 여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렸던 이야기나 소재나 경험을 상징하는게 미역국이라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해야 했고 글을 써야 했던 여성들이 남성들이 말하는 예술의 원천이 술담배라면 이 여성들이 내새운 것은 미역국 맛이었던 거죠.
글감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 기준이나 스스로 내부에서 모니터링하는 기재부터 헐어버려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것도 소재가 되나? 이런 걸 왜 쓰지? 이런 쓰기도 전에 내부에서 잡아당기는 목소리들이 있어요.
국문과에서 합평할 때 “화장이나 생리에 대해 집요하게 쓰면 남자다” 라는 농담들을 할 정도로 본인들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거침없이 쓰는 거예요. 근데 정작 여성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은 그렇게 망설임없이 쓸 기회를 박탈을 당하죠. 우린 당장 생리대부터 숨기고 다니면서 훈육이 되기 때문에,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를 한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민이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정말 아무거나 써도 돼요. 기승전결 뭐 어떤 통찰, 유머 위트 기지 다 필요없어요. 일단 쓰시면 그게 에세이입니다.
자, 이 말 되게 많이 듣는 말이죠. “자기 이야기를 쓰세요” 라는 것. 그런데 자기 이야기가 뭐지? 엠넷식 사연팔이와 자기 이야기 사이의 경계가 뭐지? 제가 얼마 전에 팟캐스트에 나와서 '저의 인생은 차녀 힙합이었습니다'라는 얘기를 했는데, 제가 사실 음치만 아니었으면 쇼미더머니에 나갈 의향이 있었어요. 제가 말도 좀 빨리하고 돈도 좋아하기 때문에, 저기 나가면 뭔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비트와 밀당을 할 줄은 몰라서... 저의 인생은 약간 그런 사연팔이로는 한 3등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도 나가시면 세미파이널까지 갈 수 있을걸요? 난 장녀였지 난 차녀였지 난 백말띠였다네 이런 걸로
그런데 문제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서사화하려는 욕구가 벌어지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거예요. 얼마전에 서울대생이 쓴 글이 인터넷에 화제가 됐었던 것 아시나요? '내가 학벌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다 나만 욕해'라는 정서가 들어있는 글이었어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그 렌즈를 통해서 재해석하고, 그 이전의 경험들을 계속해서 어떤 새롭게 열리는 감각으로 느낌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냥 자기 연민의 소재로 갇혀버리거나, 아니면 그걸로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왜곡을 해버리는 것. 이런게 저는 사연 팔이이자 자기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라고 생각해요.
엄마 불쌍하고 나 돈없고 나는 여자도 없고 이런 얘기를 해요. 불쌍한 나랑 안 만나주는 여자를 욕하고 이런게 과연 '자기 이야기'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저는 항상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게 자기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서 본인을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세계를 바라보는데 본인이 원하는데 위치시키려고 어떤 것들을 일그러뜨리는데 기여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세계를 확장해서 바라보는건지. 이 세계를 확장해서 바라본다는 말은, 이 문장 기억해주세요. 나중에 제가 보여드릴 에세이 에서도 인용이 되거든요. “사랑은 개체에서 전체를 보는 일” 이라는 문장이 있어요.
한 여성의 삶에서 당시 여성들의 삶을 추출하고 시대의 억압적인 기재를 찾아낼 수 있어요. 반대로 사회의 불평등한 문화 현사에서 내가 겪었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납득이 되는 순간이 있어요. '어, 그러고보니 그때 나도 그거였나봐' 이런 거. 제가 스무살 때 술 마시고 지하철역에서 어지러워갖고 엎드려 있었던 적이 있는데 누가 제 옆에 와서 어깨를 툭 두드리더니 "자기야, 집에 가야지"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고개를 들었더니 모르는 남자에요. 그래서 “저 아세요?” 했더니 웃던 얼굴을 싹 지우고 그냥 가더라고요. 그땐 넘어갔어요. 그런데 2015년쯤에 본격적으로 약물 강간이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하죠. 약물강간이라는 말이 생기고 소위 골뱅이강간이라고 하는, 의식이 없는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저는 갑자기 10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이 기억나는 거예요. 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와서 애인인척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게끔 다정하게 나를 일으키려던 남자가 그거였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했을 때 제 경험은 보편으로 가기도 하고 그 보편의 현상이 제 경험으로 이해시키기도 하는 거죠.
제가 '걸려서 넘어진다'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페미니스로 산다는 것, 글을 쓰며 산다는 건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예전에는 폭주 기관차같이 달리는 사람이었어요. 무지하게 언피씨한 개그를 치면서. 폭주 기관처럼 아우토반처럼 달리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어요. 왜냐면 모르니까 더 무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개그를 할때도 거침이 없었고 어떤 농담을 할때도 거침이 없었고 열 명이 있으면 아홉 명이 웃었죠. 한 명이 웃지 않을수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어요. 그러다가 하나 둘 저에게 문지방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해요. 어 잠깐 지금 내가 얘기한거 너무 장애인 혐오적인 표현같은데? 너무 이성애 중심적인 것 같은데? 하면서 제가 걸려 넘어지는 거죠.
세계에서 매끄럽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명쾌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이 세계의 울퉁불퉁한 지점들을 잃어버리고, 짓밟으면서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런 어떤 걸려 넘어지는 경험,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어? 하고 훅 걸어버리는 경험. 그런 것들이고, 그리고 뇌관처럼 터진다 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정말 어느 순간에 갑자기, 나도 스스로 기억하고 있지도 못한 사건들이 덜컹하고 떠오를때가 있어요. 갑자기 터질 때가 있어요. 그런것들이 말하자면은 나는 흘려보냈고 잊어버렸다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내 안에 숨겨져 있었고,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기억과 내 경험이라는 것들이 나한테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아 있다가 지금에와서 재해석 되기도 하고 새롭게 발견하면 더 납득할 수 있기도 한거예요.
여러분도 나중에 생각을 해보면 그냥 지나갔던 일들이 지금의 나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잇고 지금 나의 독특한 씨앗이 그때 이미 발아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거예요.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쓰기도 하는데, 나의 경험이 만든 나에 대해 쓰는 것이란 뭔지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럼 도대체 ‘나’란 뭔가? 현대 사회는 나에 대해 너무 알기를 바라죠. 자아를 찾으라고들 하죠. 서점 가면 있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같은거.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도 해요.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 라는 내가 누구고 여러분이 누구에게 보여주겠어 라는 확신의 글쓰기가 아니라 헤매고 더듬거리고 돌아보고 의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 과정 중에서도 중요한게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문장인데,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구요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 즉 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라는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 이게 사회적 약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자기 편집권인거죠.
내가 누구인지 말하고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는 것. 가장 쉬운 것은 (제가 엠넷의 그런 감성을 좀 놀렸는데 어쨌든) 쉬운 건 일차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제 책이 나왔을 때 누가 그런 말을 했죠. 너는 가족이라는 게 없으면 글을 못 쓰냐? 라고 하셨고 저는 네 라고 했어요. 확실히 경험하는 것이 다르면 글쓰기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겠구나, 내가 가족에 대해 쓰는 게 이해가 안 가다니.
여러분 이걸 보세요. 할 얘기 엄청 많죠. 항상 어른들이 말해요. 용띠 기집애들이 라는 말. 자, 경상도 출신이에요. 차녀구요, 3녀 1남이에요. 이 구성 요즘에 잘 없어요. 거의 멸종되어 가는 구성원인데, 그 다음에 자수성가한 아버지, 그리고 전업주부의 어머니. 얼마나 할 말이 많겠어요. 그리고 연년생 언니가 있죠. 자매가 있으신 분들은 잘 알거에요. 언니가 얼마나 애증의 존재인지. 고1 여동생도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줘요. 제 남동생은 중3인데 내성적이고 소위 초식남이에요. 경상도 장남 자수성가한 남자의 유일한 아들이 내성적이라는 것. 어떤 것들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런식으로 남들이 보기에 별 거 아닌 것들도 캐고 엮고 하다 보면 엄청나게 할 얘기가 많아요.
단순하게 1차 가족을 삼아서 설명을 드렸는데요.
우리가 글을 쓸 때 어떤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면 케이크 만드는데 비유를 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시트는 소재라고 할 수 있어요. 맛을 좌우하는 것들이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소재가 있어야 하죠. 그리고 여기에 크림을 발라요. 어떤 크림을 바르는가에 따라 케이크의 성질이 달라지죠. 제가 시트를 소재라고 표현한 이유는, 케이크를 바를 때 시트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바르잖아요. 그런 식으로 소재를 다각도에서 바라보자는 거죠. 나에게 있었던 경험을 하나의 물건, 촬영이라고 봤을 때 그걸 스무 살의 내가 열 살의 내가 봤을 때, 이 의미는 다 다르죠. 다르고 지금의 내 인식에서 볼 때, 이 소재를 어떤 것과 엮었을 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도 분명히 달라요. 딸기는 메시지라고 했는데 케이크의 딸기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정말 하나, 포인트, 글의 엑기스, 킬링 파트 라고 생각을 하시면 되는데 같은 소재에서 다른 메시지가 추출되기도 하죠. 예를 들면 1988년의 여아들을 모아놓고 글을 쓰라고 했을 때 전부 다 다른 글을 쓰겠죠. 어떤 것들은 공유되고 어떤 것들은 분명 다를 거예요. 그런 에세이 쓰는 작업들이 각각의 메시지와 문체와 스타일과 소재를 어떻게 결정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해요.
소재를 굽는 방법을 보면 제가 아까 걸려서넘어진다는 표현을 썼는데, 제가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쓰면서 연애 정상성에 대해 얘기한 이유는 제가 스물 두 세 살 때까지 연애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야 너는 눈이 없어 코가 없어 왜 연애를 못해” 이런 말을 했어요. 그 말이 그냥 굉장히 마음에 걸렸어요. 그거는 이전 같으면 하하 웃으며 넘어갔을 텐데 거슬렸어요. 왜 걸리지? 왜 넘어가지 못하지? 계속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제가 글쓰기 수업에서 과제를 걷어서 검토하는 조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 너무 쉽게 가르쳐 준대로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다,라고 했을 때 이건 현상이죠. 그때 결론을 '요즘 젊은이들이 성적으로 너무 문란해, 진정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결론 내리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너무 단순하게 출력된 결론이 있다면 그 결론을 다시 질문을 던져보는 게 굉장히 재밌는 작업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나서는 이것저것 주워서 아무렇게나 쌓아놓았던 경험들을 모아서 붙이고 떼어 보는 거예요. 안 맞으면 떼면 돼요. 일종의 레고 같은 건데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출산에 대해 낙태죄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하면 내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 있겠죠. 이 애기 저 얘기를 붙여보고 하는 거예요. 글을 한 번에 내려오면서 쓰는 게 아니라 문단을 긁어서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써보면 재밌어요. 저같은 경우엔 어렸을 때 미션스쿨을 다녔는데 중학교에서, 순결서약식 이런 걸 했었어요. 중1,2 애들한테 순결 사탕 먹이고... 서약식을 중2가 되면 하는데 true love is waiting이런거 플랜카드에 걸려있고 목사님이 "진정한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러고. 뭔소리야(웃음) 이런 식으로 교육을 했던 거죠. 그런 경험들이 제가 나중에 낙태죄 얘기를 할 때 재밌는 소스가 되는 거죠.
일필휘지로 쓴다기보다 조립하고. 내가 쓸 만큼 썼다고 생각하면 그 글은 끝난 글이에요. 기승전결에 맞춰서 짜임새 있게 써야 하고 멋진 마지막 문장을 찍어야 돼 하는 것도 나중 문제에요. 일단 할 말을 했으면 된거고, 그건 그때부터 조립해서 가꾸고 필요할 때 고치면 돼요. 그리고 안되면은 뭐.. 열린결말이라고 하면 되죠. 이것저것 이어붙이고 꿰매보고 여기저기 많은 소재를 여기에도 저기에도 맞춰 보는 거예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충 정해지면, 이제 스타일을 정합니다.
이게 진짜 좀 복잡해요. 스타일이 되게 멀고 또 가까워요. 우리는 우리를 제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서도 그냥 원없이 해보자, 여러분은 그걸 받아들이셔야 해요. 나의 읽는 취향과 쓰는 성향이 다를 수 있고 내 글이 내 취향이 아닐 수도 있음을 여러분은 받아들이셔야 해요. 그걸 받아들이면 글 쓸 때 스스로를 공격하는 게 덜 하게 돼요. 제가 좋아하는 글 스타일이 있는데, 제가 그렇게는 못 쓰더라고요. 욕심을 버리고 내 스타일을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 거죠.
딸기. 메시지
딸기 얹기는 말하자면 무엇에 관한 어떤 이야기인지 그 사람의 관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이 글이 어떤 글인지 결정짓는 거예요. 똑같이 비혼모의 고통에 대한 글이 있어요. 마지막에 끝나는 지점은 다 다르죠. 비혼모가 너무 살기 힘들다, 이런 얘긴데 누군가는 여성이 책임감 있게 피임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남성들이 책임 져야 한다는 삼천포로 빠지기도 해요.어? 실컷 케이크 잘 구워 놓고 마지막에 딸기가 아니라 똥을 얹고 끝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점을 찍는 것이 결국 이 메시지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게 뭔지, 사실 이게 확실해야 해요. 이게 확실하면 소재가 평범해도 본인이 하려는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거든요. 문체나 스타일이나 소재를 시트나 크림이라고 비유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성의 글쓰기라고 해서 체제 지향적이거나 전복적인 거나 그런 쓰기 자체의 의의만 있는 게 아니라 저는 그거 외에도 잘 쓰고 재밌고 멋있는 글을 원하는 거예요. 멋 부리지 마세요 라는 말도 저는 하기 싫어요. 사람들은 다 멋있고 싶잖아요. 내 글이 멋있었으면 좋겠고, 현실 고발적이지만 오락적이고 미학적인 성취를 이루고 싶기도 한거 잖아요. 이거는 제가 천희란 작가가 <소녀문학>이라는 독립잡지에 쓴 글을 보고도 굉장히 반가웠던 이유인데, 그 분이 '왜 여성작가의 페미니즘적인 글쓰기는 항상 현실고발, 체제 저항적이라는 뉘앙스로만 읽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마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면을 내주고 그 작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되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가라는 의미에요. 저는 그거 자체도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 편으론 굉장히 좋은 글과 멋진 글,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동시에, 대충 쓰슈(웃음).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말라는 거죠. 일단 대충이라도 쓰세요.
여러분 그냥 응가처럼 싸버리세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일단 뭔지 놔버리면 그때부터 매만질게 생겨요.
“잘 써야 한다는 강박. 어떤 글 하나가 반드시 사회의 이익에 기여하거나 유익하거나 예술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추거나 감동적이거나. 심금을 울리거나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은, 우리의 내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서사를 쓴다는 것, 에세이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숨을 쉬고 지문을 남기고 머리카락을 떨어트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잘’보다 쓰는 것이 중요한 행위이고 결국 쓰는 것이 잘 하는 일이다. ”
'재미'라는 것은 본인에게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거든요. 엄청 진지해보이는 글이 너무 재밌어서 빠져들어 읽을 때가 있잖아요. 단순히 그냥 유머 감각이 있고 아까 수필의 정의에서 위트와 기지가 넘쳐날 필요 없어요. 뭐가 웃기고 기지라고 결정하는 것 자체가 권력과 관련이 있잖아요. 내가 재미있는 것,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쓰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목 짓기도 너무 어렵다싶으면... 그냥 지으세요(웃음) 이상한 충고들이 있잖아요. 첫 문장은 섹시해야 한다느니,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제 글이 저한테 맞으면 돼요.
* 이진송 작가님이 내주신 글쓰기 주제는 '이제는 웃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