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민은 무거운 몸을 간신히 밀어 넣어 칸 안에 들어섰다. 코끝에 닿는 미지근한 공기, 발 아래 울리는 진동, 그리고 이어폰 너머 들려오는 익숙한 배경음. 모두가 회색빛인 이곳에서,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주머니에서 꺼낸 건 오래된 게임기였다. 닳아버린 버튼, 벗겨진 외피. 남들이 보면 그냥 구식 장난감이겠지만, 승민에게는 아니었다. 이건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다.
딸깍, 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 세계가 열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공주가 높은 탑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괴물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었고, 그는 단단한 방패와 검으로 그들을 쳐냈다. 손에 땀이 차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의 영웅이 된다는 벅찬 감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승민이 게임 속 성벽 꼭대기에 도착한 순간, 현실의 소리가 승민을 잡아 끌었다. 다음 역, 그의 목적지였다.
그는 천천히 전원을 껐다. 그리고 어둠이 되어버린 작은 화면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일은 꼭 구해줄께, 아이유.”
그는 가방에 게임기를 넣었다. 새삼 낯설어진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의 파도에 휩쓸려 나가면서도, 승민은 다시 허리를 펴고 걸었다. 이 세상엔 구해야 할 공주도, 든든한 무기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안다. 게임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자신의 경험치는 쌓이고 있다고.
하루를 버티고, 또 하루를 견디면, 언젠가는 레벨업도 할 수 있으리라는 걸.
그게 현실의 게임 방법이니까.
밤이 깊었다. 승민은 좁은 원룸 책상 위에 게임기를 올려두었다.
내일은 또 어떤 던전이 기다릴까?
모르지만 괜찮았다. 그는 이미 모험가였으니까.